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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 부르는 라면 먹는 소리…‘귀르가즘’ ASMR 열풍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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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청소, 모닥불 타는 소리, 타이핑 소리 등이 ASMR의 대표적인 ‘트리거’로 활용된다.

귀청소, 모닥불 타는 소리, 타이핑 소리 등이 ASMR의 대표적인 ‘트리거’로 활용된다.

최근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동영상이 화제가 됐다. 직원들과의 소통을 위한 라면 먹방이 ‘현기증을 부르는 소리’라는 자막과 함께 사내방송 전파를 탔고, “다 내려놓고 소통했다”는 호평을 얻었다. 흥미로운 건 현재 동영상 업계를 뒤흔들고 있는 트렌드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을 차용했다는 점이다.

“가상 세계 체험하고 여행 느낌도” #심신 릴랙스·긍정 마인드 효과 #삶이 팍팍한 젊은 세대 사로잡아 #최태원 회장 라면 먹방 영상 화제 #속삭이는 광고 등 마케팅도 활용

ASMR이란 ‘자율 감각 쾌락 반응’이라는 뜻이다. 바삭바삭 씹는 소리나 장작 타는 소리, 빗소리 등을 들으면 조용한 속삭임을 들을 때처럼 기분 좋은 소름이 살짝 돋으며 심신이 릴랙스되는 현상을 말한다. 2010년 뉴욕의 한 회사원이 페이스북에 ‘덕후’ 커뮤니티 ‘ASMR 그룹’을 만들며 생긴 신조어로, 미국과 호주에서 인기를 끌며 세계로 확산됐다. 국내에서는 2015년 이후 전문 유튜버가 대거 등장했고, 젊은 세대 위주로 강력한 지지를 얻는 서브컬처로 자리 잡았다. 2016년 이화여대 조사 결과 전 세계에서 ASMR에 대한 관심도가 전년 대비 200% 이상 증가했고, 지난해 한 언론사의 대학생 설문에서도 93% 이상이 ASMR을 접해봤다고 답했다.

최근 포브스가 조사한 국내 유튜버 수입 랭킹에서도 ASMR 유튜버 ‘제인’과 ‘홍유’가 3위와 5위에 올랐다. 다양한 질감의 디저트를 먹는 입 모양과 소리만으로 각각 구독자 933만과 520만을 모았다. 이들의 연 소득은 50억~70억원으로 추정된다.

호그와트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

최태원 회장이 등장한 SK 사내방송.

최태원 회장이 등장한 SK 사내방송.

이런 단순 먹방은 기초에 가깝다. 유튜브 소비가 급증하면서 ASMR 콘텐트도 장르화가 뚜렷해지는 추세다. 다양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차별화된 콘텐트들은 거의 새로운 예술 형식이라 할 만하다. 실제로 이런 창작자들을 ‘ASMRtist’라 부르기도 한다.

이른바 ‘귀르가즘’을 표방하는 ‘롤플레이 1인극 ASMR’이 가장 흔하다. 가녀린 소녀풍 외모의 20대 여성이 카메라를 향해 귀 청소, 피부과 시술 등 역할극으로 귓속말을 속삭이며 ‘릴랙스’를 유도한다. 개그우먼 강유미는 이를 패러디해 섹시 코드 대신 개그 코드를 입힌 역할극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유튜버 제인의 디저트 먹방 ASMR.

유튜버 제인의 디저트 먹방 ASMR.

환경음으로 가상의 공간을 조성하는 ‘앰비언스 ASMR’도 있다. 유튜버 ‘수프’는 해리포터 호그와트 학교의 도서관, 짱구네 집에서 낮잠 자기, 인어공주 바닷속 세상 등 특징적 소리만으로 마치 스크린으로 들어간 듯한 가상의 공간을 연출한다. 시험공부 할 때 듣는다는 ‘수프’의 한 10대 구독자는 “내가 호그와트 학교에서 공부하는 기분이 들어 집중이 잘된다”고 말했다.

유튜버 ‘낮잠’은 아예 소설을 쓴다. 중세 판타지, 빅토리아 시대 로맨스 판타지 등의 제목 하에 그럴싸한 음향을 만들고 짤막한 자작 소설 도입부를 써 놓으면, 팬들이 댓글로 소설을 이어가는 식이다. ‘낮잠’은 “구독자 대부분이 수험생이거나 지친 삶에 위로를 찾는 분들이다. 나도 유학 시절 같은 상황에서 앰비언스 ASMR을 찾아 들었던 경험이 있어 그분들께 가장 필요한 것을 드리고 싶다. 특정 테마의 상황에 흠뻑 취할 수 있도록 스토리텔링을 해봤는데, 구독자들이 스스로 상상한 글을 덧붙이면서 특별한 놀이터가 됐다”고 전했다.

강유미의 ASMR 유튜브 채널.

강유미의 ASMR 유튜브 채널.

이런 트렌드를 포착한 기업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지난 5월 디즈니플러스는 ‘알라딘’‘겨울왕국’ 등 기존 애니메이션의 대화와 음악을 주변 소음으로 대체한 비디오 클립 시리즈 ‘제니메이션’을 선보였다. ‘마인드웰’‘팅글스’ 등 다양한 ASMR사운드를 들려주는 구독형 명상 앱도 많다. 스마트폰 없이도 ASMR을 들으며 취침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전용 헤드폰도 나왔다.

광고 콘텐트에도 적극 활용되고 있다. 가수 아이유가 속삭이는 두통약 광고, 배우 한소희의 비스킷 광고가 대표적이다. 여자만 속삭이는 건 아니다. 가수 헨리는 화장품 광고에서 자기 얼굴을 꼬집으며 "찹쌀떡 같다”고 속삭이고  김풍 셰프도 “라면 먹고 갈래?”라고 유혹한다. 가구회사 이케아의 홍보 영상도 유명하다. 침대 시트를 쓸어내리거나 담요를 살살 두드리는 영상에 조용한 속삭임으로 상품을 하나씩 소개하는 내레이션에 “마케팅부서 월급을 올려줘라. 25분짜리 광고를 기꺼이 보게 만들었으니”라는 댓글이 달렸다.

ASMR이 가진 매력의 정체는 뭘까. 소리로 유발되는 공간감이나 촉각 같은 ‘버추얼한 감각’에 주목할 만하다. 음악음향학·음악심리학을 연구하는 일본 가나자와공업대학 야마다 마사시 교수는 "뇌 안에 청각과 촉각을 자극하는 부분이 매우 가까워 청각의 자극이 촉각 처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추정한다. 롤플레이 1인극에서 귀 청소나 피부 맛사지를 주요 콘텐트 삼는 이유다. 영상을 통해 실제 전달되는 것은 시각과 청각이지만, 리얼한 입체음향이 마치 귓속말을 들을 때 짜릿하게 돋는 소름과 같은 촉각으로 이어져 실제 그 음의 행위를 체험하고 있는 듯한 기분에 젖는다는 것이다.

입체음향 녹음을 위해 사용하는 바이노럴 마이크.

입체음향 녹음을 위해 사용하는 바이노럴 마이크.

사운드스케이프(소리풍경)를 연구하는 한양대 음악연구소장 정경영 교수는 “랜드스케이프는 갖고 다닐 수 없지만 사운드스케이프는 갖고 다닐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라면서 “사운드스케이프를 갖고 다닌다는 건 같은 공간에 있어도 다른 장소에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주말에 갈 법한 장소의 소리를 들으며 멀티태스킹을 한다.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풀벌레, 파도 소리 등 특정 공간의 정체성을 버추얼한 사운드로 즐길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유튜버 ‘수프’는 “팬들은 듣는 것만으로도 가상 세계를 체험하고 여행을 떠난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고 전했다. ‘낮잠’도 “우연히 외국 유튜버가 제작한 헤어샵 3D 사운드를 듣고 그 현실적인 공간감에 푹 빠지게 됐다. 이어폰을 끼고 소리에 집중하면 현실과 전혀 다른 공간으로 순식간에 다녀오는 경험에 매료됐고, 특정 장소의 현장감을 강조하는 3D 앰비언스 ASMR을 제작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언택트 라이프가 확산된 것도 ASMR 열풍을 더욱 부채질했다. 구글트렌드 상에서도 잠시 주춤하던 ASMR 검색이 올해 다시 상승했고, 특히 한국에서 압도적으로 관심이 높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공간감이나 촉감을 느끼기 어려워진 온라인 세상에서 신체성에 대한 자각을 욕망하고 배출하는 대안적인 매체로 ASMR이 떠오른 것이다.

올 시즌은 중단됐지만, 뉴욕에는 실제 ASMR 트리트먼트를 받는 ‘ASMR 스파’ 공연이 있다. 극작가 앤드류 호프너가 개발한 ‘위스퍼랏지’는 이머시브 공연과 테라피가 결합한 형태로, 90분 동안 3개의 방을 돌아다니며 배우들이 귓속말을 하고 머리도 빗겨주는 ‘멘탈 마사지’를 받는다. 동영상의 롤플레이를 실제 몰입형 퍼포먼스로 재해석한 셈이다. 호프너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팔로우 어스: 우리 지금 세계’에서 “여기서 하는 모든 일은 디지털화된 삶과 싸우는 일이다. ASMR을 현실 속 배경으로 가져옴으로써 이런 친밀한 관계를 누군가와 맺도록 독려한다”면서 “본질적 반응은 현실로 돌아갈 때 확인할 수 있다. 문을 열고 나갈 때 바람소리, 빛이 더 강렬히 느껴지는 것이 우리가 주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힘든 현실 속 젊은 세대 외로움 반영

ASMR의 실제 효과도 몇 년 사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2016년 캐나다 위니펙대 심리학과와 매니토바대 영상의학과의 실험에서 ASMR 영상이 정보를 전달하고 해석하는 영역의 뇌 활동은 감소시키고 기억을 주관하고 감정을 판단하는 영역은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확인됐다. 영국 셰필드대학 심리학과 연구팀은 2018년 ASMR 경험자들의 심박 수가 저하하고 신체가 릴랙스되며 긍정적인 감정이 강해진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한양대 융합시스템과 연구팀도 뇌파 대역을 분석해 ASMR 사운드에 이완 효과와 가벼운 집중, 수면유도 효과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밝혔다. ASMR이 뇌를 쉬게 하고, 좋은 기억을 되살려 안정감과 편안함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성균관대 사회학과 구정우 교수는 ASMR이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특히 인기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IT강국인 한국의 청년들은 1인 가구가 많고 극도의 도심 생활에 지쳐 있다. 최근엔 특히 언택트 라이프로 소외감과 외로움이 커진 측면도 있다. 나만 보는 일기장을 SNS로 보여주며 위로받고 싶은 심리와 마찬가지로 누군가 속삭이듯 말을 건네는 느낌을 추구하게 된 것”이라며 “트렌드에 민감한 한국 청년들이 대세를 안 따르면 뒤처지는 듯한 집단적인 압박감도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경영 교수는 ASMR 콘텐트가 앞으로 더욱 세분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니홈피의 배경음악, 카카오톡의 프로필 음악처럼 디지털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공간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 수단이 음악에서 사운드 자체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백여 년간 음악은 대중매체를 통한 산만한 청취로 발전해 왔다. 음악에 집중하기보다 배경으로 소비하게 됐고, ASMR까지 온 것”이라며 “과거에 비틀스나 바흐를 듣는 것으로 나를 표현했다면, 이제 ‘나는 이런 분위기의 소리 듣는 사람이야’로 정체성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내다 봤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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