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인생 전반은 여우로 살다가 후반은 고슴도치 돼라

중앙일보

입력 2020.09.11 09:00

[더,오래]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68)

명동에 있는 금융회사에 입사했던 때다. 신입사원 연수를 마칠 무렵 각자 희망부서를 적어내라고 한다. 조사 업무가 적성에 맞을까 고민하다가 금융을 알려면 현장을 먼저 경험해야겠다는 마음에서 영업부를 지원했다. 간단한 교육을 받고 일선 창구에 배치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창구에는 대부분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사원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차츰 업무를 익혔다.

처음에는 돈을 만지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 다소 긴장했는데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나아졌다. 내가 하는 일은 창구에 온 손님에게 금융상품을 설명하고 예금을 받는 업무였다. 손님이 상품을 선택하면 돈과 함께 뒤에 있는 책임자에게 결제를 의뢰하고 출납업무가 진행되기를 기다렸다. 창구 직원에게는 고객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이 시간이 참 무료하다. 손님이 많거나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 후속 업무가 지연되기라도 하면 그만큼 기다려야 한다. 손님도 지루하긴 마찬가지다.

금융회사 창구에서 일하던 시절, 업무가 지연될 때면 고객과 얼굴을 맞대고 기다려야 했다. 나는 그 시간을 고객의 성향을 파악하는 기회로 삼기로 했다. 취미도 이야기하고, 관심 분야도 물었다. [사진 pxhere]

금융회사 창구에서 일하던 시절, 업무가 지연될 때면 고객과 얼굴을 맞대고 기다려야 했다. 나는 그 시간을 고객의 성향을 파악하는 기회로 삼기로 했다. 취미도 이야기하고, 관심 분야도 물었다. [사진 pxhere]

어느 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 시간을 고객의 성향을 파악하는 기회로 삼았다. 하루는 손님에게 취미를 물었더니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고 한다. 나도 역시 그렇다고 했더니 그가 동지를 만난 듯 반가워하며 자신의 취미활동에 대해 자세히 얘기했다. 업무를 마치고도 한동안 앉아서 마저 얘기를 나눈 후 자리를 떠났다. 며칠 후 그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충무로에 음반을 사러 왔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들렸다며 클래식 음반 두 장을 선물했다. 또 서로 음악 얘기를 나눈 것은 물론이다.

언젠가 그는 나를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집에는 3만 여장의 음반이 장르별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아마 방송국 두 군데를 제외하면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음반이 개인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자식이 둘이 있는데 그만큼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지 않아 본인 사후에 이들 음반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이렇듯 관심사가 같으면 서로 쉽게 가까워질 수 있음을 알았다. 그 후부터 틈날 때마다 고객의 취미나 관심사가 무엇인지 물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영화 이야기를, 건축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건축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연히 난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그에게 난을 키우는 법을 물었더니 오랜 시간 동안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누가 물어준다면 그보다 반가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얼마 후 그는 꽤 큰돈을 가져와 우리 회사에 예치했다.

내게 또 어떤 관심사를 가진 사람이 올지 몰라 부지런히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쌓았다. 반대로 나에게 취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이때도 시큰둥하게 대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명하는 것이 좋다. 하루는 고객이 내게 사교춤을 출 수 있냐고 물어 그건 잘 모른다고 하니 자신과 같이 배우자고 권한다. 큰마음을 먹고 퇴근 후 그가 안내하는 교습소에 갔다. 신규회원으로 등록하고 서너 번 나갔으나 사교춤은 아무래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 후 몇 번 가지 못하고 중도에 하차했다.

세월이 흘러 사내 순환 근무원칙에 따라 관리부서에 있다가 부장이 되어 다시 영업부로 돌아왔다. 창구 직원들에게 우리 앞에 어떤 손님이 올지 모르니 업무에 관한 지식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교양을 쌓으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관심을 표한 직원과 함께 음악회나 전시회를 찾아 색다른 경험을 맛보게 했다.

하루는 어느 직원이 음악회에 가서 클래식 음악만 들으면 졸린다는 얘기를 하며 그때 자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코만 골지 않는다면 음악을 들으며 자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데 하며 그를 격려했다. 그리고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비화를 들려주었다. 이 곡은 독일 드레스덴 주재의 러시아 대사였던 헤르만 카를 폰 카이저링크 백작이 그의 불면증을 치유하기 위해바흐에게 작곡을 의뢰했던 음악이다. 백작은 클라비어 연주자 골그베르크의 연주를 들으며 잠을 이루었다는 에피소드다.

창구 직원들에게 업무에 관한 지식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교양을 쌓으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관심을 표한 직원과 함께 음악회나 전시회를 찾아 색다른 경험을 맛보게 했다. [사진 pxhere]

창구 직원들에게 업무에 관한 지식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교양을 쌓으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관심을 표한 직원과 함께 음악회나 전시회를 찾아 색다른 경험을 맛보게 했다. [사진 pxhere]

이런 기회를 통해 직원들이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을 갖고 자기계발이나 고객관리에 활용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그들에게 이것저것 섭렵하며 관심을 가지되 그중 하나는 전문가 수준이 되도록 파고들라고 조언했다. 나중에 은퇴해서는 그게 인생 2막에서 할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취미를 이용해 은퇴 후 창업에 성공한 동료도 있다.

20세기 대표적 사상가 중 한 사람인 이사야 벌린은 그가 쓴 글에서 인간을 고슴도치형과 여우형 두 가지로 분류했다. 고슴도치형은 속담에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는 것처럼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삶이다. 융통성은 모자라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반면 여우형은 인생을 살면서 맞닥뜨리게 될 무수한 변화를 인정하고 다채로운 경험을 추구하는 삶이다. 임기응변에 능하지만 깊이는 부족하다.

사람은 한 가지 유형으로 살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여우형이 되기도 하고, 고슴도치형이 되기도 한다. 그가 사례로 분석한 톨스토이도 어떤 시기에는 여우가 되었다가 또 어떤 시기에는 고슴도치의 인생을 살았다. 인생 전반부처럼 시간이 많이 남아 있을 때는 여우와 같은 다양한 삶을 추구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생 후반부는 고슴도치와 같이 한 분야에 몰입하는 삶을 권하고 싶다.

인류가 신석기 시대 이후 오늘처럼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살았던 사람이 전해주는 지혜에 자신의 경험을 더해 뒤에 올 사람에게 전해주는 것이 수만 번 반복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전례에 따른다면 인생 2막은 지금까지 했던 일 중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 자신이 살아온 흔적을 남겨야 할 때다. 생을 살며 앞의 사람에게 여러 도움을 받았는데 나는 과연 무엇을 전해주고 갈 것인가 하는 생각에 젖어보는 것도 이 가을이 주는 선물이다.

아름다운 인생학교 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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