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피해자ㆍ유족에 무책임한 한ㆍ일…흘러간 75년 세월이 서럽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광복 75주년 한수산의 기록-일제 강제동원, 빼앗긴 가족들 ⑤-끝

10일 서울 구로구의 자택에서 만난 김종대 일제강점하유족회 회장. 한학에 조예가 깊어 동네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던 그의 아버지는 29세에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돼 목숨을 잃었다. 임현동 기자

10일 서울 구로구의 자택에서 만난 김종대 일제강점하유족회 회장. 한학에 조예가 깊어 동네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던 그의 아버지는 29세에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돼 목숨을 잃었다. 임현동 기자

아버지는 29세에 뉴기니 끌려가 #비행장 건설 노역, 끝내 못돌아와 #1973년 피해자 보상운동 뛰어들어 #태평양전쟁유족회 전북지부 결성 #1991년부터 13년 간 일본법정 투쟁 #김학순 할머니 현지 활동 돕기도 #집ㆍ농장ㆍ교직연금 운영비로 사용 #월세살이 노년이지만 당당한 궁핍

※편집자의 말
“저쪽이 조선이다.”
한수산 작가의 소설 『군함도』는 일본에 끌려간 징용공의 이 말로 시작한다. 중앙일보 광복 75주년 기획 ‘일제 강제동원, 빼앗긴 가족들’은 징용공이 그토록 그리워 했던 ‘저쪽 조선’에 남았던 아들딸들의 이야기다.
그의 소설 속에서 목숨을 걸고 군함도 탈출을 시도한 조선인들은 징용공이기 전에 아버지였다. 27년간의 조사와 고증 끝에 군함도로 끌려간 아버지들의 사투를 소설로 완성한 한수산 작가가 이제 남겨졌던 강제 동원 피해자 아들딸들의 생존기를 중앙일보에 기록한다.

김종대 일제강점하유족회 회장 

 맑은 물이 흘러 물고기까지도 깨끗했던 섬진강 상류, 전북 임실군 지사면에서 태어난 김종대(83·일제강점하유족회 회장)씨. 그가 네 살 때였다. 29세의 아버지 고(故) 김판용씨는 일본군 군속으로 남양군도 뉴기니로 강제동원된다. 그리고 1944년 8월 세상을 떠났다.

“동쪽 하늘을 향해서 ‘판용아 판용아, 너 언제 돌아오니’ 할머니는 그러시고, 어머님은 장독대에 물을 떠놓고 빌었지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건 국민학교 때 들었던 것 같아요.”

광복 후였다. 마을에서 함께 끌려갔던 친구 안진석씨가 집에 와 알려주면서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늘 ‘일본은 웬수 나라’라고 하시던 어머니 정일순씨는 원래 목소리가 컸다. 그 어머니가 대성통곡하면서 집안이 울음바다가 됐다.

강제노역 시달리다 귀국길 수장된 아버지 

1992년 6월 1일 도쿄지방재판소 713호 법정에서 김 회장은 “강제동원된 선친은 남양군도 파라오에서 해군 군속으로 비행장 건설현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시다… 고준마루(廣順丸)로 귀국 도중 미 군함의 포격을 받고 사망했다”고 구두변론을 시작한다.

이를 근거로 여러 선박 기록을 살펴보면 고준마루는 오사카 철공소 사쿠라지마 공장에서 1924년 준공된 1927t의 화물선이다. 1944년 3월 징발돼 일본 해군성에 배속됐다. 1944년 8월 8일 1454명의 일본인 귀국자를 싣고 파라오를 출항, 마닐라로 향하던 배는 8월 13일 민다나오섬 성 어거스틴곶(串)으로부터 3㎞ 떨어진 해상에서 미군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를 맞고 침몰했다. 아버지 김판용도 선원 27명, 편승자 15명이 사망한 이 배의 침몰과 운명을 함께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종대 회장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네 아버지의 혼이라도 꼭 모셔오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보상운동에 뛰어들었다. 비가 와서 마당에 널어놓은 곡식 나락이 다 젖는 것도 모른 채 책에서 눈을 떼지 않던 선비. 그게 어머니가 평소 김 회장에게 전해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임현동 기자

김종대 회장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네 아버지의 혼이라도 꼭 모셔오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보상운동에 뛰어들었다. 비가 와서 마당에 널어놓은 곡식 나락이 다 젖는 것도 모른 채 책에서 눈을 떼지 않던 선비. 그게 어머니가 평소 김 회장에게 전해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임현동 기자

위패를 써 가묘를 만들고 아버님의 초혼장을 지냈다. 그 후 김 회장은 남양군도 추도 순례에서 흙 한 줌을 가져와 무덤에 넣고 사초(莎草)를 했다.

평생 수절, 세남매 지극정성 키운 어머니 

할머니를 극진히 모시며 세 남매를 길러낸 어머니는 전형적인 수절의 삶을 사셨다. 여수에서 건어물을 떼어다 팔던 어머니는 아들을 엄하게 길렀다. 영양보충시킨다면서 추어탕을 끓여놓고 안 먹는 아들을 회초리로 때렸을 정도다. 아들은 전주사범 본과에 입학,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며 어머니의 자랑이 됐다.

“우리 어머님은 오직 저만을 위해 사신 분이셨습니다. ‘네 아버지 유해를 꼭 찾아서 모셔 와라’ ‘아버지랑 같이 묻어 다오’ 그게 유언이었습니다. 98세로 돌아가신 어머님을 아버지 위패와 함께 고향땅에 모셨지요.”

전주사범을 나와 이리국민학교에서 첫 교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12년 동안의 평교사 생활을 접고 매형 정영철씨가 설립한 동명학원의 동계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다. 전국에서 제일 나이 어린 교장이었다.

젊은 교장의 교육이념은 노작교육(勞作敎育)이었다. 교육학자 듀이가 주창한 일하며 배운다(Learning by doing)는 이념이었다. 밤이 많이 나는 지역 특성을 살려 학생들을 위한 밤 농장을 조성했고,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농악부도 만들었다. 특성화된 많은 노력으로 1996년 스승의날에는 국민포장을 받기도 했다.

70년대 정부 '무성의 보상' 시도에 분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가족이 연대를 시작한 것은 1971년 정부가 ‘대일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5월 21일부터 10개월간 피해 신고를 받기 시작하면서였다. 정부는 신고 후 확정된 8552명에게 30만원씩 총 25억6000만원을 지급했다.

피해 유가족은 미흡하기 짝이 없는 ‘장례비도 안 되는 돈’을 위로금이라고 내미는 정부에 맞서 수취 거부운동을 시작했다. 그 중심에 1973년 부산에서 발족한 태평양전쟁유족회(이후 유족회)가 있었다. 유족회 전라북도 지부를 결성하고 김종대도 보상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활동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1991년 12월 6일 도쿄지방법원에 제소한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소송’이었다. 일본의 식민지배 범죄에 대한 반성과 사죄, 1인당 2000만 엔의 배상금 지불을 요구하는 소송에서 김종대도 군인, 군속,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구성된 원고단의 한 사람이었다.

1991년 12월 6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은 일본 도쿄지방법원에 보상 청구 소송을 냈다. 위안부 피해 실상을 공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앞줄 왼쪽 첫번째)도 원고단에 참여했다. 제소 뒤 기자회견에서 김 할머니가 밝힌 일제의 만행은 일본 사회 내에서 가해자 의식이 싹트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김종대 회장(앞줄 오른쪽 세번째)이 관련 활동을 도왔다. [사진 가쓰야마 히로스케]

1991년 12월 6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은 일본 도쿄지방법원에 보상 청구 소송을 냈다. 위안부 피해 실상을 공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앞줄 왼쪽 첫번째)도 원고단에 참여했다. 제소 뒤 기자회견에서 김 할머니가 밝힌 일제의 만행은 일본 사회 내에서 가해자 의식이 싹트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김종대 회장(앞줄 오른쪽 세번째)이 관련 활동을 도왔다. [사진 가쓰야마 히로스케]

위안부 피해자의 진실을 공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와 함께 김종대는 일본으로 향했다. 원고단의 한 사람으로 김학순 할머니가 왔다는 그것만으로도 일본 사회는 소송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일본 땅을 다 준다 한들 내 잃어버린 청춘을 보상받겠습니까!”

김학순 할머니가 도쿄지방법원 2층에서 한 기자회견은 역사의 수면 아래 봉인돼 있던 일본의 허위를 발가벗기는 진실, 그것이었다.

위안부 피해 공개 증언 김학순 할머니 도와 

은폐의 장막을 걷고 모습을 드러낸 위안부 피해자의 참혹한 실상과 그로 인해 짊어져야 했던 가혹한 삶, 일본 정부를 향한 분노는 수많은 일본인에게 ‘가해자 인식’을 불러왔고, 역사학자들이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직시하고 연구하는 계기가 됐다.

2004년 11월 29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상고 기각 판결이 날 때까지 소송은 13년이 걸렸다. 일본을 오간 40여 차례의 법정 투쟁, 그때마다 가두행진을 하며 이어갔던 항의와 시위, ‘최고재판소’라고 쓴 현판을 떼어 내동댕이쳤던 분노까지 일본의 무책임 앞에 무너져내린 허망한 결과였다.

“김학순 할머니가 가해국 일본에서 활동하도록 도운 것도 우리 유족회였고, 97년 돌아가셨을 때도 생전에 다니시던 교회와 유족회가 합동으로 장례를 치르고 망향의 동산에 모셨습니다.”

도쿄지방법원에 소송을 낸 뒤 가두시위를 벌이는 원고단. 유족들은 일제에 의해 희생된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었다. 피해자와 유족들은 13년 간 재판이 진행될 동안 공판이 열릴 때마다 도쿄에 가 약 40여 차례의 가두시위를 했다.

도쿄지방법원에 소송을 낸 뒤 가두시위를 벌이는 원고단. 유족들은 일제에 의해 희생된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었다. 피해자와 유족들은 13년 간 재판이 진행될 동안 공판이 열릴 때마다 도쿄에 가 약 40여 차례의 가두시위를 했다.

김종대씨가 대표 혹은 공동대표를 맡았던 유족회는 92년 9월 14일 보사부로부터 사단법인 허가를 받아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로 명칭을 바꾼다. 이후 전국의 피해자와 유족들의 구심점이었던 서울의 중앙회가 내홍이 짙어지며 고소·고발에 휩싸였다. 뿔뿔이 흩어진 30여 개의 유족회 단체가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2009년 1월 김종대도 새로운 단체 ‘사단법인 일제강점하유족회’를 설립한다.

보상운동에 헌신, 이제 자녀들이 울타리 

스물여덟 살에 김종대는 다섯 살 아래인 최영자씨와 결혼했다. 그가 유족회 활동을 이어가는 동안 아내의 보살핌 속에 5남매의 아이들이 자랐다. 아버지를 닮아 다들 수재라는 칭송을 듣던 자녀들이 이제 성인이 돼 아버지의 울타리가 돼 있다.

유족회를 운영하랴, 일본에 소송하러 다니랴 김 회장은 그때그때 둘째딸에게 1억원을 가져다 썼다. 아파트 마련도 막내딸이 발벗고 나서서 해줬다.

“내가 지금 주공아파트에서 월세로 살아요. 연금요? 퇴직하면서 절반은 현금으로 찾아 단체 운영비에 쓰고 절반만 연금으로 돌렸어요. 돈이 나오긴 하는데, 그걸 내가 갖고 있으면 다 써버리니까 통장을 딱 집사람한테 맡기고 나도 거기서 타서 써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는 김종대 회장에게 아버지가 그리운 적은 없었냐고 묻자 "학생 때 고학을 하면서도 우등생이었다. 친구들은 아버지가 선물도 주고 칭찬도 해주는데 나는..."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보상운동에 사재도 거의 털었지만 후회는 없다. 임현동 기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는 김종대 회장에게 아버지가 그리운 적은 없었냐고 묻자 "학생 때 고학을 하면서도 우등생이었다. 친구들은 아버지가 선물도 주고 칭찬도 해주는데 나는..."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보상운동에 사재도 거의 털었지만 후회는 없다. 임현동 기자

그와 가까운 분들은 ‘김종대는 유족회 운동을 하다 알거지가 된 사람’이라고 한다. 사무실 보증금과 단체 운영비에 이자까지 겹치면서 8000만원이 김 회장의 빚으로 남은 적이 있다. 이 빚의 담보로 제공했던 대지 100평 기와집과 전답, 6000평의 농장을 그는 결국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가 맞고 있는 ‘빈손뿐인 노년’은 과거사 해결을 위해 맞서 싸운 용기의 결과물이다. 그가 피해 유가족의 보상운동에 흘린 땀이 만들어낸 당당한 궁핍이다.

소극적 정부에 절망, 변명 일본에 분노

1992년 1월 17일자 중앙일보 종합 15면에 실린 기사가 있다. ‘절망·분노·한, 태평양전쟁유족회장 김종대씨의 생애는 이 세 단어로 축약된다’는 기사다. 그의 절망은 ‘일제 피해자 보상에 소극적인 정부’에 대한 절망이었고, 그의 분노는 ‘사죄와 반성 없이 변명으로 일관하는 일본’에 대한 분노였다. 그의 한은 ‘아버지의 시신도 모시지 못한 불효’의 한이었다.

30대 후반에 뛰어들었던 보상운동이었다. 김 회장도 어느덧 80세를 넘긴 세월이 흘러갔다. 그의 절망과 분노와 한은 무엇이 치유되고 어떻게 달라졌는가.

내 국민에 대한 사랑과 존엄이 있었다면 75년의 세월을 이처럼 흘려보냈을까. 가장 나쁜 것은 국가였다. 일제 강점기 피해자와 유가족 문제에 어떤 일관된 정책도 없었다. 피해자와 유족들의 목멘 탄식이다.

정치는 타협의 예술이다. 투쟁도 양보와 조정을 통해 길을 열고 진화한다. 관계자 모두의 독단만이 뒤엉킨 75년이 그래서 서러운 것이다.

가해국 일본만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피해국으로서의 책무를 다했는가. 청산도, 해원도 없이 흘러가 버린 75년이! 한국 정부에 묻고 있다.

한수산 작가.

한수산 작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