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슬리퍼 신고 재활용 자전거로 국토 종단 후원자

중앙일보

입력 2020.09.07 08:00

[더,오래] 허호의 꿈을 찍는 사진관(22) 

2015년 8월, 강상규 수의사와 자전거를 좋아하는 컴패션 후원자들. 원래 2013년부터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는 컴패션 후원자들 몇몇과 국토종단을 해왔는데 2015년부터는 의미 있는 일을 하자며 컴패션 어린이들을 위해 모금을 하고 있다. [사진 허호]

2015년 8월, 강상규 수의사와 자전거를 좋아하는 컴패션 후원자들. 원래 2013년부터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는 컴패션 후원자들 몇몇과 국토종단을 해왔는데 2015년부터는 의미 있는 일을 하자며 컴패션 어린이들을 위해 모금을 하고 있다. [사진 허호]

요즘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한편으로는 모처럼 사진을 정리하는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지난 15년간 컴패션을 통해 전 세계를 돌고 수많은 후원자를 만났던 시간이 컴퓨터 파일로 켜켜이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휙휙 지나가면서 넘기는 사진도 있고, 한참 들여다보게 되는 사진도 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의 사진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슬리퍼를 신고 자전거를 신나게 타는 너털웃음이 기가 막힌 한 남자의 사진입니다. 제게 신선한 깨달음을 준 친구이자 컴패션 후원자인 강상규 씨입니다.

그는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수의사입니다. 대를 이어 2대째 같은 자리에서 수의사의 길을 걷고 있죠. 가축을 전문으로 하는 수의사인 아버지와 달리 그는 반려동물이 대세인 세태를 반영해서인지 멍멍이나 고양이 엉덩이에 4000~5000원짜리 주사를 놓으며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는 넉넉하고 털털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컴패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열정의 남자이죠.

강상규 수의사는 원래 꿈이 ‘시골 수의사’였다. 그런데 아버지 일을 물려 받으며 30대 중반에 꿈을 이뤄버리고 말았다. 좋은 가정까지 이뤘지만 편두통과 무기력증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다 좋은 아빠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션 씨의 책 〈오늘 더 사랑해〉를 보다 후원하게 되었고, 제이슨이라는 콜롬비아 아이를 후원하면서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았다. 2018년 필리핀컴패션 어린이센터에서.

강상규 수의사는 원래 꿈이 ‘시골 수의사’였다. 그런데 아버지 일을 물려 받으며 30대 중반에 꿈을 이뤄버리고 말았다. 좋은 가정까지 이뤘지만 편두통과 무기력증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다 좋은 아빠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션 씨의 책 〈오늘 더 사랑해〉를 보다 후원하게 되었고, 제이슨이라는 콜롬비아 아이를 후원하면서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았다. 2018년 필리핀컴패션 어린이센터에서.

2015년 8월 한여름은 숨이 턱턱 막히도록 폭염이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폭염을 뚫고 자전거로 600㎞ 국토종단을 하면서 어린이를 위한 기금을 모금한다는 사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강씨였고 이 프로젝트는 이름하여 ‘사이클링 포 컴패션, CFC(Cycling For Compassion)’. 이 대담무쌍한 사람들을 찍기 위해 경북 포항으로 향했습니다. 마침 푹푹 찌던 날씨가 물러가고 비바람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자전거 타는 걸 좋아해 서울~부산 종단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이곳저곳을 누벼온 사이클링 마니아였습니다. 그런데 처음 만난 동해안 바닷가에서 나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의 자전거와 슬리퍼였습니다.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장장 600여 km를 달릴  변속기어도 없는 일반 자전거를 맨발의 슬리퍼를 신은 채 동네 마실 나온 사람처럼 여유롭게 타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버려진 자전거 부품을 모아 사회적 기업 ‘두 바퀴 희망자전거’에서 노숙인이 만들어준 재활용 자전거였습니다.

“언덕을 오를 때 변속기어가 없으면 힘들지 않습니까?”
“그럴 땐 내려서 걸어갑니다.”

그가 인생에 순응하는 법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장거리를 슬리퍼로 타는 게 괜찮은지도 물었습니다. “대부분 컴패션 아이들은 맨발이나 슬리퍼로 지냅니다. 저도 느껴보고 싶어서요.”

제 머리가 번쩍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한계 이상의 힘든 순간을 맞았을 때 이겨내려고 발버둥을 치지 말고 그에 순응하라고 배우지는 못합니다. 그가 준 충격은 제게 깨우침이 되었습니다.

2018년, 필리핀컴패션 어린이 집을 가정방문하고 그 집에서 뭔가 먹을 걸 해주고 싶어했던 우리. 부엌 사정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기가 막힌 표정을 짓고 있는 강상규 수의사. 그가 평소 보여준 여유롭고 장난기 어린 표정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2018년, 필리핀컴패션 어린이 집을 가정방문하고 그 집에서 뭔가 먹을 걸 해주고 싶어했던 우리. 부엌 사정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기가 막힌 표정을 짓고 있는 강상규 수의사. 그가 평소 보여준 여유롭고 장난기 어린 표정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처음 이 프로젝트에 동참한 동지 중에는 장거리를 처음 탄 사람도 있었습니다. 찌는 듯한 폭염 속에서 하루에 150㎞ 이상 자전거를 타는 것은 체력도 체력이지만, 분명한 목표가 없다면 해내기 어려운 고행일 것입니다. 왁자지껄하게 재미있는 말로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에서나,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서로의 호흡을 맞춰가는 거친 숨소리에서나, 묵묵히 페달만 밟는 긴 침묵 속에서 하나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순간 빛을 발한 건 역시 강 씨였죠. 그는 준비된 리더십으로 동료를 독려하며 끝내 통일 전망대까지 완주해 냈습니다. 저 같으면 엄두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와 컴패션 후원자들은 그 후 매년 8월 달렸다고 합니다. 2015년에는 인도 어린이들에게 통학용 자전거를 보낸 것을 시작으로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없는 엘살바도르 가정에 공급하는 가정용 정수필터나 케냐 가정을 위한 젖염소, 필리핀 아빠들의 자립을 돕는 트라이시클 선물까지. 올해도 빼놓지 않고 탄자니아 어린이들에게 자전거 400대를 보내는 나눔펀딩을 진행했고, 항상 일찍 마감되는 바람에 오히려 후원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경우도 있었지요.

그와 함께한 사진은 그야말로 저에게 시간을 되새김질해주며 음미할 맛이 나게 했습니다.

사진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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