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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은수의 퍼스펙티브

주류가 된 SF소설, 인간 사유의 한계를 시험하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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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SF소설에 열광하는 이유

소수의 작가와 열광적 팬들의 영역이던 SF소설이 한국 문단의 주류로 떠올랐다. SF소설은 어떠한 미래도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축소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순 없음을 보여 준다. [중앙포토]

소수의 작가와 열광적 팬들의 영역이던 SF소설이 한국 문단의 주류로 떠올랐다. SF소설은 어떠한 미래도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축소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순 없음을 보여 준다. [중앙포토]

‘공상과학(SF)소설이 주류로 올라서다.’

SF적 상상력, 문학에 기생하는 대신 문학의 주류로 떠올라 #과학기술 가속화와 코로나19서 보듯 언제든 다른 미래 가능 #기술 변화가 인간의 적응 속도를 추월한 예측불능 세계에서 #SF소설은 인간이 이런 세계에 지속해 저항할 것임을 보여줘

최근 한국 문학에서 일어난 큰 사건이다. 오랫동안 SF는 문학의 한 게토(소수자 거주 지역)였다. 소수의 작가와 열광적 팬들이 온갖 시도를 거듭하면서 어렵게 명맥을 이어가는 하위문화(서브컬처)에 속했다. 문학의 생산·평가가 이뤄지는 사회 문화적 공간인 문학장(文學場)을 지배하는 문단 중심의 주류 문학에서 SF는 문학적 실체가 아니라 언제나 이를 빌려 써서 보충하는 형태인 ‘SF적 상상력’으로 호명됐다.

그러나 좋은 반복은 반드시 대가를 얻는다.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 이후 SF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세대에 걸쳐 한 줌씩 던진 흙이 쌓여 푸른 바다를 뽕나무밭으로 만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바다가 있던 자리에서 오디가 열리기 시작했다. SF 소설이 결국 게토의 벽을 넘어뜨렸다.

선두에 선 것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2019)의 김초엽이다. 이 작가는 ‘오늘의작가상’, ‘젊은 작가상’을 받으며 한국 문학의 미래로 떠올랐다. 독자 열광도 대단했다.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15만 부 이상 판매됐다.

SF는 가보지 않은 미래 끌어당겨

선배들과 달리 김초엽은 혼자가 아니다. 『보건교사 안은영』, 『지구에서 한아뿐』, 『목소리를 드릴게요』 등의 정세랑이 눈에 띈다. 이 작가는 다양한 장르의 문학을 ‘장르이면서 문학’으로 다룰 줄 아는 눈부신 재능이 있다.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의 전천후 작가 장강명, 『천 개의 파랑』의 천선란, 『돌이킬 수 있는』의 문목하,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의 심너울 등도 있다. SF적 상상력이 문학에 기생하는 대신에 SF 소설 자체가 문학의 한 주류가 됐다.

『SF는 정말 끝내주는데』에서 심완선은 SF가 “세계를 건드리는 장르”라고 말한다. 모든 예술은 현재의 세계를 건드려 다른 질서의 세계를 구축하는 사고 실험이다. “가보지 않은 미래를 끌어당기고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를 경험”하게 만든다. 무엇으로 건드리느냐에 따라 장르가 나뉘는데 SF는 상상의 도구로 과학기술을 이용한다. 구체적 방법은 무한하지만, 셋으로 크게 나뉜다.

첫째, 과학기술의 가속이다. 현재 우리가 아는 과학적 지식을 극한까지 진전시키면 미래는 어떻게 변할까. SF 소설 대부분은 이 방법을 시도한다.

둘째, 대안적 분기다. 역사의 유일한 법칙인 우발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과거의 한 시점에서 인류의 역사가 다르게 전개됐다면 현재는 어떻게 바뀔까. 대체역사, 평행우주 소설 등이다.

셋째, 이질성의 출현이다. 코로나19의 습격이 보여 준 것처럼 이 세계에는 언제든 다른 미래가 나타나는 것이 가능하다. 남자들이 질병과 전쟁 등으로 모조리 사라진다면, 또는 한 달에 며칠쯤 성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미래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따라서 현재를 도구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어리석다. 프랑스 철학자 퀑탱 메이야수의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에 따르면 19세기 사람들은 사륜마차 사고가 엄청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오늘날 사륜마차는 거의 사고를 내지 않는다. 사라졌다. 코로나19 역시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미래는 현재의 연장일 수 없음을 드러냈다. 코로나19보다 거대한 파국도 이미 시나리오가 나와 있다. 지구의 평균 온도가 현재 속도로 상승할 때 우리가 내다본 2050년의 세계는 백일몽일 뿐이다.

알파고 이후 인공지능(AI)의 등장이 보여준 것처럼 오늘날 세계를 바꾸는 가장 강한 힘은 과학기술이다. 조이 이토 MIT 미디어랩 소장은 기술 변화가 인간의 적응 속도를 추월했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 수 없는 세계를 우리 손으로 만드는 셈이다.

이런 세계에서 종래의 모든 사유는 유효성을 잃는다. 우리한테는 우리 사유의 한계를 시험하고 그 바깥으로 사유를 옮길 수 있도록 돕는 새로운 도구가 필요하다. 오늘날 이러한 욕구를 충족해 주는 미래 스토리텔링, 즉 미래학은 오늘날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비즈니스 중 하나다.

“빌어먹을 놈들한테 짓밟히지 말라”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SF소설은 기술의 가속화를 따라잡는 유일한 문학이다. SF소설이 먼저 있고 과학기술이 뒤쫓는다고 하는 게 더 옳겠다. 로봇을 비롯해 화상 통화, 태블릿 PC, 홍채 인식, 무인 자동차, 유전자 조작 등 우리는 옛날 SF의 세계를 현재 살아가는 중이며, 현재의 SF를 좇아서 미래를 살 것이다. SF는 과학기술보다 한 발 앞에서 미래를 선취한다. 프랑스 국방부가SF 작가를 고용하고,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SF의 대가 더글러스 애덤스의 자문을 받는 이유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SF 소설은 어떠한 미래도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축소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순 없음을 보여 준다.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다룬 SF소설들은 인간이 이러한 세계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보여 준다. 『시녀 이야기』에서 마거릿 애트우드는 말한다. “빌어먹을 놈들한테 절대 짓밟히지 말라.” 이야말로 SF소설이 미래를 작동시킬 때 누르는 진짜 커맨드 키(command key)이다. 인간은 인간다움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SF소설은 새 작가와 출판사, 독자 수용의 삼 박자 갖춰

시녀 이야기

시녀 이야기

요즈음 독서계에서는 SF소설의 빅뱅 이야기가 풍성하다. 지난 몇 달간 교보문고·예스24·알라딘 등 대형 서점 세 곳이 모두 SF소설 시장의 급성장을 보고했다. 세 서점 발표를 종합하면 지난 10년 동안 SF소설 판매량은 5.5~7배 커졌다. 특히 최근 3년 동안 신장세가 가팔랐다. 알라딘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가장 많이 팔린 SF소설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였다. 20위 안엔 신간도 있었다. 테드 창의 『숨』(4위)과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6위)이다.

문학 작품은 좋아서 읽는다. 지식이나 정보, 학습이나 취업 때문에 읽지 않는다. 목적이 없기에 문학에 일단 빠지면 오래간다. 청년기에 탐닉했던 작가나 장르의 작품을 평생 읽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작가와 함께 성장하고 늙어 가는 독자’가 있는 것이다. 문학에서 20대 독자의 존재는 한 작가나 장르의 미래를 보는 확실한 지표이다.

숨

그런데 세 서점이 모두 SF 문학 시장에서 20대 독자 비율이 높아졌다고 말한다. 알라딘에 따르면 이 시장의 20대 점유율은 1999~2009년 3.5%에서 2010~2019년 19.3%로 커졌다. 중심 독자가 40대 초반으로 이동 중인 전체 도서시장에서 이런 분야는 별로 없다. 20대 독자가 시장을 주도한 것은 한 세대 전에나 가능한 일이다. SF소설은 앞날 밝은 ‘젊은 시장’에 속한다.

전망 좋은 시장에는 작가와 독자와 출판의 선순환이 있다. 작가의 장르 실험이 넉넉히 독자를 설득하고, 독자의 비판적 취향이 작가에게 영향을 미치며, 출판이 이를 단단히 연결할 때 한 장르의 지속 가능성이 생겨난다. 이를 보여 주는 것이 새로운 작가와 출판사의 탄생과 독자의 수용이다.

김보영·듀나·배명훈 등 중견에 이어 김초엽·정세랑 등이 큰 인기를 누리고, 심너울·천선란 등 신인의 첫 작품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은 장르의 건강성을 드러낸다. 아작·안전가옥·알마 FoP·허블 등 전문 출판사의 출현도 심상치 않다. 전문 잡지와 비평이 부족한 게 아쉽다. 냉정한 평가가 없으면 붐은 쉽게 거품이 된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리셋 코리아 문화분과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