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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대는 현대판 '음서제'? 조광조는 왜 추천제 주장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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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진보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진보'라는 의미에는 여러 가지 기준이 들어가지만, 이전 시대보다 많은 사람에게 공정하고 평등한 기회가 보장됐는지의 여부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렇다면 고려와 조선은 어땠을까요. 조선이 고려보다 여권(女權)이나 개방성에서 뒤처졌다는 지적도 있지만 적어도 인재선발이라는 방식에서는 진보한 사회였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제를 확충하고, 음서제를 축소해 소위 ‘개천에서 용이 나는’ 길을 더 넓혀놨기 때문입니다.

[픽댓]히스토리 #과거제 대신 현량과 꺼내든 조광조 #"지역에 덕망있는 인재를 추천받자"

그런데 건국된 지 100년가량 지난 16세기 초, 과거제를 흔드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유명한 학자이자 관료인 조광조가 추천제 인재 등용 방식인 현량과를 들고나온 것이죠. 그 파장은 일파만파 커지며 조선 사회를 흔들었고, 당대 지식인 사회는 이에 대한 찬반 때문에 둘로 나뉘게 됩니다. 그렇다면 개혁파 엘리트 관료였던 조광조는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요.

19세기 과거시험장을 그린 '소과응시'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 과거시험장을 그린 '소과응시'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음서제의 고려, 과거제의 조선 

음서제는 간단히 정의하자면 집안 배경으로 관직으로 나아가는 방식입니다.

고려시대 음서제는 5품 이상 고위직의 아들·손자·사위에게 관직을 세습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줬습니다. 그러니까 재상의 아들로 태어나면 아무것도 안 하고 손가락만 빨아도 벼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 고려의 현실이었죠. 음서 출신자의 약 50∼60%가량이 재상에 오른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또 『 고려사』의 음서 규정엔 18세부터 벼슬이 가능했지만, 실제로는 유명무실한 기준이 되어버려 고려 선종 때 이식이라는 인물은 5세에 벼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고려 시대의 최고위직에 올랐던 경대승이나 이인임 같은 인물도 이런 음서를 통해 비교적 수월하게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조선에서도 음서제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다 엄격하게 적용했습니다. 3품 이상 관료만 활용할 수 있었고, 음서 출신자는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청요직에는 오르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조선에서는 청요직을 거치지 않으면 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으니, 한계가 분명한 ‘뒷길’인 셈이었죠.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설파한 정도전 [사진 SBS]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설파한 정도전 [사진 SBS]

또 조선은 귀족이 아닌 사대부의 나라인 만큼 실력 아닌 집안 배경으로 들어온 음서 출신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양대군의 최측근인 한명회 같은 사람도 음서로 벼슬에 올랐다가 주변에서 무시를 당하니까 계유정난이 성공한 뒤 과거시험을 따로 볼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과거제는 대과(大科) 혹은 문과(文科)라고 부르는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소과를 통과해야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공식적으로 3년에 한 번 실시해 33명만 뽑았습니다. 얼마 전까지 치렀던 사법시험과 행정·외무고시에서 매년 수 백명씩 뽑았다는 것을 참작하면 매우 적은 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조선의 인구는 지금보다 훨씬 적었지만, 양반이라면 연령이나 응시횟수 제한 없이 대부분 도전했다는 것을 고려해볼 때 경쟁률이 매우 높았을 것입니다. 또 이런 방식은 당대 동서양의 다른 국가와 비교해봐도 대단히 체계적이고 공정한 선발방식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통과한 사대부들의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조광조, 추천제를 꺼내 들다  

그런데 중종 13년 3월 큰 사건이 벌어집니다. 조광조와 그를 따르던 사림들이 국왕에게 과거제의 한계를 지적하며 추천제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이죠.

“문장만으로는 좋은 인재를 구할 수 없습니다. 학문이 풍부하고 덕이 있는 사람을 추천받으면 대현인(大賢人)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방에서는 감사(監司)와 수령(守令), 한양에선 홍문관(弘文館)과 육경(六卿) 및 대간(臺諫)이 임용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면 인물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종실록』13년 3월 11일)

정암 조광조 [중앙포토]

정암 조광조 [중앙포토]

쉽게 말해 입시공부만 하던 고시생으로는 참된 인재를 가리기 어려우니, 덕망을 갖춘 인재도 지역에서 추천을 받아서 관직에 등용하자는 것이었죠. 이것은 사림파의 교육 철학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사림파는 과거 시험의 당락을 좌우하는 문장력을 사장학(詞章學)이라며 무시했습니다. 사장(詞章)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시, 소설, 수필 등 문학작품을 가리킵니다. 자유로운 상상력과 사회에 대한 관심에 바탕을 둘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사장학을 하는 선비들은 다양한 분야에 관해 관심을 뒀고, 조선 초기엔 풍수·의학·수학 같은 학문도 중시했습니다. 과거 시험도 이런 부분을 적극적으로 반영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중기 등장한 사림파는 경전을 해석하고 우주와 인간 심성의 본질에 관심을 두면서 과거제로 들어온 사람들을 그저 문장 다루는 기술만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얕봤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인성이나 그 밖의 능력은 제대로 가리지 않은 채 필기시험만 잘 봐서 들어왔다는 것이죠.

“조광조 등이 이학(理學)을 귀하게 여기고 사장(詞章)을 천하게 여겨 매번 경연에서 '임금은 시를 지어서는 안 되고 신하에게 지어 바치게 해서도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중종실록』 12년 9월 9일)

"주희도 과거제를 통해 선발됐다" 

당연히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대파는 성리학자들이 떠받드는 송나라의 주희나 정호 같은 인물도 과거시험에서 뽑힌 사람들인데 왜 이 시험을 무시하느냐는 논리를 폈습니다.

“근래 과거를 위한 공부는 정학을 해치므로 폐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송나라의 주자와 정자도 모두 과거를 거쳐서 나온 사람입니다. 과거를 통해 선비를 뽑더라도 어진 사람이 나올 수 있습니다. (과거제를) 폐지해서는 안 됩니다.”(『중종실록』 12년 8월 30일)

이런 반발에 조광조 세력도 한발 물러섰습니다. ①각지에서 추천을 받고 ②이들만 대상으로 특별한 테스트를 거쳐 문과 급제자와 동일한 권리를 부여하자. 당초 100% 추천제에서 한발 뒤로 물러난 일종의 절충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려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과정 자체가 내포한 불공정의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남곤 같은 재상은 “(과거 중국에서 실시했을 때) 천거된 사람들은 천거한 사람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정작 재주가 있던 사람들이 누락됐다”는 반론을 펴기도 했습니다.취지는 좋지만 제도의 허점을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고 본 것이죠.

2016년 제23회 조선시대 과거제 재현행사가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희궁에서 열렸다. 응시생들이 과거시험을 치르고 있다. 조선시대 갑오경장 때 폐지됐던 과거제는 폐지된 지 정확히 100년이 되었던 1994년에 재현되기 시작해 올해로 23년을 맞이하고 있다. 오상민 기자

2016년 제23회 조선시대 과거제 재현행사가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희궁에서 열렸다. 응시생들이 과거시험을 치르고 있다. 조선시대 갑오경장 때 폐지됐던 과거제는 폐지된 지 정확히 100년이 되었던 1994년에 재현되기 시작해 올해로 23년을 맞이하고 있다. 오상민 기자

끼리끼리 나눠 먹은 현량과  

그래도 중종은 조광조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2년 뒤인 1519년 봄 28명이 현량과로 뽑혔습니다, 합격자들은 문과 합격자와 같은 증서(홍패)도 받았죠. 그런데 시험 결과가 나오자마자 우려하던 일이 터집니다. 당시 재상이었던 안당의 세 아들이 모두 현량과에 합격한 게 문제가 됐습니다.
안당은 이조판서 시절 성균관 학생이던 조광조를 천거해 시험도 안 보고 종6품에 올려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전력 때문인지 안당은 훗날 조광조 세력의 지원을 받고 우의정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안당의 세 아들이 28명뿐인 합격자 명단에 모두 들어간 결과는 두고두고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밖에도 현량과에서 장원을 차지한 김식은 조광조와 절친한 친구였고, 한 달 만에 홍문관의 부제학이라는 높은 지위에도 올랐습니다. 또 현량과에 합격한 28명 중 절반이 당시 주요직인 대간이나 홍문관에 배치됐습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 응시자가 낸 답안지. 오른쪽 상단에 이름·나이· 본관은 물론 증조와 외조의 직함 등도 적어 냈다. [사진제공=함양박물관]

조선시대 과거시험 응시자가 낸 답안지. 오른쪽 상단에 이름·나이· 본관은 물론 증조와 외조의 직함 등도 적어 냈다. [사진제공=함양박물관]

여론이 워낙 좋지 않았기에 사관들도 안당의 세 아들이 합격한 것은 ‘복(福)이 아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안당의 세 아들이 일시에 급제하였으므로, 임금이 술과 고기를 많이 하사하여 하례했다. 사람들은 모두 이를 영광으로 여겼으나 식자(識者)들은 이것이 안씨의 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한형윤이 말하기를 ‘이것이 참으로 급제한 것이라면 매우 좋겠지만…’ 하였으니, 이번 천거과(薦擧科)가 공도(公道)로 한 것이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중종실록』 14년 8월 30일)
일각에선 조광조 세력이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빠르게 구축하고,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해 현량과를 꺼내들었다고 의심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조광조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훗날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탄핵된 이유에는 '인맥·파벌로 권력을 나눠먹었다'고 지적하기 때문이죠.

“(조광조는) 저희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저희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세력을 만들어 서로 의지하여 권력이 있는 요직을 차지하고, 위를 속이고 사사로운 감정을 행사하되 꺼리지 않았습니다…이로써 국론이 전도되고 조정이 날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므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속으로 분개하고 한탄하는 마음을 품었으나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공공 의대의 해법은? 

 전국의사 2차 총파업 첫날인 지난달 26일 경기 수원시 아주대학교 병원에서 전공의들이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하고 있다. 정부는 이날 의대 정원 확대 정책 등에 반발하며 무기한 집단 휴진에 나선 수도권 전공의와 전임의들에게 업무개시 명령을 발동했다. [뉴시스]

전국의사 2차 총파업 첫날인 지난달 26일 경기 수원시 아주대학교 병원에서 전공의들이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하고 있다. 정부는 이날 의대 정원 확대 정책 등에 반발하며 무기한 집단 휴진에 나선 수도권 전공의와 전임의들에게 업무개시 명령을 발동했다. [뉴시스]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김태엽 의료연대본부 서울대병원분회장이 의사들의 진료 거부를 중단하고 의료인력 확충할 것을 촉구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김태엽 의료연대본부 서울대병원분회장이 의사들의 진료 거부를 중단하고 의료인력 확충할 것을 촉구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공공 의대 설립을 놓고 정부와 의료계가 격렬하게 부딪혔습니다.
의료계는 일부 특정 계층의 자녀들이 의사가 될 수 있게 길을 터주게 될 것이라며 파업으로 맞섰고, 이에 대해 정부는 “오해일 뿐, 통상적인 입시절차를 거친다”며 해명했습니다. 극적인 타협의 길이 열렸지만, 갈등이 쉽게 봉합될 거 같지 않아 보입니다. 여론도 '정략적인 졸속 정책'과 '의사들의 밥그릇 챙기기'로 나뉘어 있습니다.

물론 모든 제도가 완벽할 수는 없고, 미비점을 찾아 보완하는 것도 정부의 역할 중 하나입니다. 다만 정부가 내놓은 보완책이 아무리 좋더라도 공정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면 환영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특히 '공정'이라는 화두를 중시하는 요즘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과거 평창 동계올림픽 때 정부가 사회적 합의 없이 여자 아이스하키팀에 북한 선수들을 넣는 단일팀을 구성해 큰 논란이 벌어졌던 적도 있습니다.

'평생도' 병풍 중 과거 급제를 그린 부분 [사진 밀양시립박물관]

'평생도' 병풍 중 과거 급제를 그린 부분 [사진 밀양시립박물관]

자원이 부족하고 유교적 사회질서가 자리 잡은 한국에서는 '인재'로 양성되는 길이 신분상승을 꿈꿀 수 있는 사다리가 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인재 선발'은 언제나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과거 고려와 조선도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음서제-과거제-현량과 등을 시행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우리는 두 왕조가 겪은 시행착오를 보면서 인재를 어떻게 선발할 것이며, 그 과정은 공정했는지, 혹은 그로 인해 초래할 부작용은 없는지, 마지막으로 선발된 인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정부와 의료계도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하는데 그치기보다는 이번 기회를 통해 의료계를 위한 근본적이고 현명한 대안을 모색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유성운·김태호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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