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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 배송 원조는 '판교 수박'…농심 라면이 키운 '소떼 목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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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빛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상인들의 세계에선 예나 지금이나 이 작은 차이가 성공을 좌지우지하는 비결이 되기도 한다. 외면받던 판교 수박을 '새벽 배송'으로 귀한 몸으로 올려놓은 가락동 농수산시장 상인의 이야기부터, 공무원을 그만두고 마장동시장에 뛰어들어 목장까지 차린 상인, 고종 황제의 내탕금으로 세워진 광장시장의 이야기까지 우리가 몰랐던 서울 상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서울역사편찬원 『서울 상인들의 시장통 이야기』 발간

농수산물도매시장 관계자들이 수박을 트럭에서 내려 선별하고 있다. [중앙포토]

농수산물도매시장 관계자들이 수박을 트럭에서 내려 선별하고 있다. [중앙포토]

'새벽 배송'의 원조?…수박 몸값을 높이다

 서울역사편찬원은 4일 서울 상인 8명의 구술을 바탕으로 엮은 『서울 상인들의 시장통 이야기』를 발간했다. 가락동 농수산시장 상인 이강하(74)씨의 이야기도 함께 담겼다. 이씨는 입대 후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뒤 용산 청과물도매시장에 경비원으로 입사해 상인으로 변신했다. 그는 우리가 여름철 흔히 먹는 수박 이야기를 꺼냈다. 1970년대 서울청과 판매과에서 일할 때였다.

 당시엔 수박이 축구공처럼 동그란 모양으로 '금메달' 품종이 대세를 이뤘다. 하루는 그에게 부탁이 들어왔다. 판교 출신의 지인이 '수박을 좀 팔아달라'며 수박밭에 데려간 것이었다. 이씨에게 '금메달보다 값을 잘 받아달라'는 부탁에 아이디어를 냈다. 값을 잘 받을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신선도'였다. 수박밭에서 지인과 소주를 진탕 마시고는 해가 넘어갈 때쯤 농부들에게 "수박을 이제 따서 밭고랑에 내놓아 달라"고 했다. 농부들은 의아해했다. 이씨는 농부들이 해 질 무렵에 수확한 수박을 이튿날 새벽 4시에 트럭에 싣고 가락시장으로 향했다.

 수박 경매가 시작되기 직전. 중매인들은 판교에서 올라온 수박에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이씨는 호기롭게 수박 한 통을 잘라 맛을 보라고 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중매인에게 그가 판 가격은 한 통에 4500원.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 올라오는 인기 있는 '금메달 수박'이 한 통에 2500~3500원을 쳐주던 것에 비하면 귀한 대접을 받은 셈이었다.

 이씨는 "전라도에서 올라오는 수박은 미리 따는 바람에 차로 올라오면서 열을 잔뜩 받아 뜨끈뜨끈한데, 판교에서 온 수박은 밤새 열을 식히고 열 받기 전에 새벽에 실어 가져오니 꼭지도 싱싱하고, 하나도 시들지 않고 생생했다"며 비결을 설명했다. 말하자면 요즘의 '신선 새벽 배송'으로 몸값을 높인 것이다. 그는 "당도계로 재면 금메달 수박이 더 달지만, 입으로 먹어보면 판교 수박이 금방 따왔으니 더 달고 아삭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농민들이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도 판매를 잘못하면 망하는 것"이라며 "농민들이 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상품을) 해줘야 한다"고 비결을 말했다. 그는 보잘것없던 판교 수박의 몸값을 높였다는 입소문으로 TV까지 출연하기도 했다.

서울 마장축산물 시장의 옛 모습. [중앙포토]

서울 마장축산물 시장의 옛 모습. [중앙포토]

공무원 접고 '마장시장' 상인된 이영언씨

 마장축산물시장의 상인 이영언(76)씨는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하다 그만두고 상인이 됐다. 우시장에 도축장까지 있어 목동들이 경기도 일원에서 소를 서너 마리씩 몰고 걸어서 오던 시절이 있었다. 고기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친구 이야기에 1975년 마장시장 내 점원으로 취업했다. 이후 친구와 동업을 하다 독립을 했는데 고기 납품을 하면서 운이 트였다. 롯데그룹 창업주인 고(故) 신격호 회장의 동생인 신춘호 농심 회장이 라면 사업에 뛰어들 때였다.

 롯데호텔에 고기를 납품하면서 생각이 닿은 것은 목장이었다. 그는 "아무나 사업자등록증을 갖고 정육점 허가를 내면 누구나 기업하고 거래할 수 있었는데, 서울이 커지고 인구가 많아지면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다 보니 경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경쟁력을 키우려면 남이 길러놓은 소를 사다가 (납품) 하는 것보다 직접 소를 사육하면 아무래도 원가 면에서 절감이 되고 경쟁력이 높아진다"며 목장으로 눈을 돌린 이야기를 했다. 마장동 상인에서 목장운영까지 하는 큰 손이 된 셈이었다.

 그는 1997년 외환위기(IMF) 직전에 고향인 강원도 평창에 목장을 설립하고는 고군분투를 했다. 직접 키운 소의 육질을 좋게 하기 위해 해외 목장을 직접 둘러볼 정도였다. 그는 "소를 기르는 과정에서 우리처럼 애지중지해서 운동시키고, 곡물 주고 그러는 곳은 없다"며 "우리는 우사를 평당 몇십만원에서 몇백만원씩 투자해서 전기시설 급수시설, 방풍시설을 다 한다"고 했다.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광장시장. [사진 서울시]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광장시장. [사진 서울시]

고종이 만든 광장시장…우리 '한복' 시장의 핵심

 광장시장을 움직이는 광장주식회사의 송호식 대표는 오랜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는 광장시장이 고종 황제의 내탕금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곳이라고 했다. 그는 "고종황제가 상설시장을 만들라고 지시해 만든 것이 광장시장"이라고 설명했다. 허허벌판이던 동대문 밖 사람들이 장사하다 광장시장이 생기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는 것이다. 초기 광장시장주식회사엔 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가 경리로 일했다고 한다.

 송 대표는 "광장시장 주식회사의 주식을 외환위기 때까지 보유하다 두산이 주식을 매각했다"며 두산과의 오랜 인연을 설명했다. 두산 창업주인 박승직은 광장시장에서 화장품인 '박가분'을 팔았다고 전해진다. 박가분은 1916년 상표를 등록한 것으로 창업주의 아내인 정정숙씨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광장시장 설립을 위해 내탕금을 지원했던 고종황제. [중앙포토]

광장시장 설립을 위해 내탕금을 지원했던 고종황제. [중앙포토]

 박가분은 1930년대 이후 일본 등에서 화장품 수입이 늘어나면서 판매가 중단됐다. 송 대표는 "박가분 흥행 뒤 해방 이후 두산그룹의 초대 회장을 지낸 박두병씨가 동양맥주의 적산공장을 인수하면서 오비맥주를 만들어 크게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광장시장은 조선인의 시장이었고, 조선의 기둥"이라며 "지금까지도 전국에 유통되는 한복이 모두 광장시장을 통해 판매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상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번 책 발간에 대해 이상배 서울역사편찬원장은 "광복 이후 성장하고 변화를 겪어온 주요 시장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며 "서울 상인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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