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 코드 장착해 술술 읽히는 보르헤스

중앙선데이

입력 2020.09.05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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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2호 20면

신준봉 전문기자의 이번 주 이 책

죽음의 모범

죽음의 모범

죽음의 모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이경민·황수현 옮김
민음사

후배 카사레스와 공동창작
다양한 경향 공존하는 소설집

패러디·능청…평범함 거부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 탐문

“방대한 양의 책을 쓴다는 것은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 단 몇분에 걸쳐 말로 완벽하게 표현해 보일 수 있는 어떤 생각을 500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어뜨리는 짓. 보다 나은 방법은 이미 그러한 생각들을 담고 있는 책들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하나의 코멘트, 즉 그것들의 요약을 제시하는 척하는 것이다.”(『픽션들』, 1994년)

기자가 읽은 보르헤스의 문장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들이다. 세르반테스 이후 가장 문제적인 스페인어권 작가로 얘기되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말이다. 적어도 장편소설 독서 후에 찾아오는 허망함을 달래주는 문장이다. 실은 보르헤스라는 방대한 우주에 접근하는 은밀한 경로를 제시하고 있다.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에 대한 의구심(장편을 문제 삼는다), 주석에 대한 주석(책은 결국 세상에 대한 하나의 해석일 텐데 자신의 책은 그에 대한 코멘트를 하려는 거라니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가벼운 유희성?(진지한 요약이 아니라 요약하는 척한다고 했다) 이런 것들이 그의 소설적 관심사였다는 얘기다.

문제적인 작가 보르헤스. 50대 중반 완전 실명한 후 평생 텍스트에 파묻혀 살았다. 무슨 생각에 미소 짓는 걸까. [사진 Levan Ramishvili]

문제적인 작가 보르헤스. 50대 중반 완전 실명한 후 평생 텍스트에 파묻혀 살았다. 무슨 생각에 미소 짓는 걸까. [사진 Levan Ramishvili]

보르헤스 감상을 돕는 경유지 목록에 하나를 추가해야 할지 모르겠다. 보르헤스가 평생 문학 도반(道伴)으로 삼았던 열다섯 살 아래 소설가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1914~1999)와 함께 쓴 『죽음의 모범』은 이를테면 덜 어려운 보르헤스다. 국내에도 대표작 『모렐의 발명』이 소개돼 있는 카사레스는 SF·환상·탐정소설에 능했다고 한다. 그래서일 텐데 700쪽이 넘는 『죽음의 모범』 안에는 탐정소설 형식의 작품들이 여럿이다.

전체 6부 가운데 1부 ‘이시드로 파로디에게 주어진 여섯 가지 사건’에 묶인 여섯 편의 단편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의 서문을 쓴 아르헨티나 학술원 회원 헤르바시오 몬테네그로에 따르면 파로디는 전 세계 탐정소설 역사상 처음 등장한 수감된 탐정(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다), 그러니까 정주형(定住型) 탐정이다. 몬테네그로는 파로디의 정주성이 “지성의 상징이자 공허한 열의로 격앙된 미국 추리 소설을 단호히 부정하는 도전행위”라고 능청 떤다.

그런 해설에 걸맞게 파로디의 사건 해결 시리즈는 통상의 탐정소설과 사뭇 동떨어진 모습이다. 독자가 끼어들어 해결의 향방을 추측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단서’라는 게 크게 부족해 보인다. 『죽음의 모범』을 번역하고 작품해설을 쓴 조선대 이경민 교수는 파로디가 주어진 언어정보만으로, 현장 출동 없이(갇혀서 못 한다)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파로디 시리즈’는 정통 탐정소설에 대한 패러디라고 분석했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카사레스와 함께 했어도 보르헤스는 변하지 않는다. 이 시리즈에 묶인 단편들을 읽다 보면 탐정 이름 ‘파로디’ 자체가 패러디를 뜻하겠다는 점을 어느새 알게 된다. 보르헤스의 페이크(속임수)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파로디 시리즈를 비롯해 『죽음의 모범』에 실린 상당수 작품의 저자가 발표 당시에는 오노리오 부스토스 도메크로 알려졌다고 한다. 가상의 인물을 내세운 것이다. 부스토스는 보르헤스의 증조부 성(姓), 도메크는카사레스의 증조부 성(姓)이다. 서문을 쓴 몬테네그로도 마찬가지. 표제작인 3부 ‘죽음의 모범’에는 아르헨티나 신사로 나온다. 역시 존재한 적 없는 가상의 인물이다. 곳곳이 허방, 보르헤스의 소설에 평범한 구석은 없다. 현실을 똑같이 재현할 수 있다고 허풍 떠는 사실주의 소설 김 빼기다.

카사레스. [사진 Alicia D’Amico]

카사레스. [사진 Alicia D’Amico]

2부 ‘두 가지 놀라운 환상’은 카사레스의 기여가 많았던 모양. 술술 읽힌다. 앞서 언급한 3부 ‘죽음의 모범’은 보르헤스 지옥. 두 번 읽었는데 난공불락이다.

비오르헤스 듀오(보르헤스+비오이 카사레스)의 후반기 합작품을 모은 5부 ‘부스토스 도메크의 연대기’가 오히려 보르헤스답다. 가령 이에 포함된 단편 ‘세사르 팔라디온을 기리며’는 원작을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베끼는 뻔뻔한 소설 쓰기를 다룬 『픽션들』의 단편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와 결국 같은 얘기를 하는 작품이다.

‘라몬 보나베나와 함께한 어느 오후’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는 누구인가? 현기증 나는 오늘의 나, 잊힌 어제의 나, 예측 불가인 내일의 나. 영혼보다 더 실체가 없는 것이 있나요?”

그러게. 나는 누구인가. 보르헤스를 읽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신준봉 전문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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