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문화의 창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생각한다

중앙일보

입력 2020.09.03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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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지난 7월 21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막한 ‘새 보물 납시었네’는 최근 3년간(2017~19년) 국보, 보물로 지정된 유물들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특별전으로 그야말로 문화유산 축제의 장이건만 개막 3주 뒤부터는 폐쇄되어 이달 말(27일)이 지나면 끝난다. 너무도 아쉬워 제발 마지막 일주일만이라도 열 수 있기를 손 모아 기도한다.

세종대왕이 4부씩 만들게해
임란 때 전주사고 본만 구해내
안의와 손홍록이 피난시킨 것
원문·번역 인터넷 무료서비스

이 전시회에는 21세기에 극적으로 발굴된 백제 사리함 두 개,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국보 제327호)와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보물 제1991호)가 10년간의 보존처리를 마치고 국보·보물 자격으로 출품되었다. 그림과 글씨로는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품  22건이 지정되어 겸재 정선의 ‘해악(금강산) 전신첩’, 단원 김홍도의 ‘고사인물도’,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추사 김정희의 ‘대팽고회(성대한 요리와 우아한 모임)’ 같은 천하의 명품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특히 현재 심사정의 길이 9미터에 달하는 대작 ‘촉잔도’를 이인문의 ‘강산무진도’와 진열장을 마주하고 함께 전시하면서, 46억 화소로 스캔한 ‘강산무진도’의 디테일을 사방 벽면에 이미지월로 보여준 것은 실로 장관이었다.

그중 내가 가장 감동받은 것은 각종 『조선왕조실록』이 『태백산사고본』만 제외하고 총동원된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일찍이 1973년에 『정족산사고본』(2,077책)이 국보 제151-1호로 지정된 바 있는데, 새로 『오대산사고본』 『적상산사고본』 『봉모당본』, 그리고 『낙질 및 산엽본』(국보 제151-6호)까지 지정되어 그 험난했던 망실과 이동과 보존의 역사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조선 효종실록, 종이에 활자 인쇄, 51.2x32.9㎝, 국립고궁박물관.

조선 효종실록, 종이에 활자 인쇄, 51.2x32.9㎝,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조실록』은 태종 때부터 편찬되기 시작했는데 세종대왕은 역시 선견지명이 있어 만약을 위해 4부씩 만들게 하여 경복궁 춘추관(오늘날 국사편찬위원회), 충청도 충주,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분산 보관시켰다. 이것이 4대 사고의 시작이다. 그런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서울, 충주, 성주의 실록이 모두 불타버리고 6월에는 하나 남은 전주 사고도 풍전등화에 놓여 있었다.

경기전의 참봉 오희길(吳希吉)은 내장산으로 옮길 생각을 했으나 이를 모두 담으려면 60여 궤짝에 말 20여 필이 필요로 하였다. 전쟁에 정신없는 관리들은 땅에 묻을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이에 오참봉은 태인에 살고 있는 선비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에게 도움을 청하자 이들은 집안사람과 하인 등 30여 명을 인솔하고 와서 실록을 내장산 산속 암자로 피란시켰다. 이후 두 사람은 물경 1년 하고도 닷새 동안 이듬 해(1593년) 7월 조정에서 충청도 아산으로 옮기라는 명이 내려질 때까지 내장산에 기거하며 실록을 지켰다. 그때 안의는 64세, 손홍록은 56세였다. 벼슬도 없는 무명의 선비가 사재를 털어가며 끝내 실록을 지켜낸 것이다. 훗날 이들에게는 별제(6품) 벼슬이 내려졌다. 안의와 손홍록은 의병(義兵) 못지않은 의인(義人)이자 애국자이고 문화유산 지킴이의 상징이다.

조선 효종실록, 종이에 활자 인쇄, 51.2x32.9㎝, 국립고궁박물관.

조선 효종실록, 종이에 활자 인쇄, 51.2x32.9㎝, 국립고궁박물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실록은 새로 4부를 복간하여 춘추관에 1부, 강화 마니산(후에 정족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후에 적상산)에 4대 사고를 지어 보관하였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와 6·25동란 때 실록은 또 다시 망실의 아픔을 겪게 된다. 『오대산사고본』은 일제가 동경대학 도서관으로 가져갔는데,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대부분 소실되었고 57책만 겨우 건졌다. 그런데 훗날 도서관에서 대출해갔다가 반납하지 않았던 17책이 발견되었고 또 1책이 민간에서 확인되어 총 75책이 되었다. 이 『오대산사고본』은 2006년에 환수되어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적상산사고본』은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해방 직후 도난 사건으로 낙권이 많이 생긴 상태에서 6·25때 북한군이 가져가 평양의 중앙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춘추관 본은 전란 중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되었는데 그 일부 남아 있는 것이 『낙질 및 산엽본』이다. 오직 『정족산사고본』은 규장각에, 『태백산사고본』은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렇게 관민이 합심하여 지켜온 것이 『조선왕조실록』이다.

오늘날엔 누구나 인터넷으로 원문과 한글 번역을 볼 수 있는데 이는 2006년, 국사편찬위원회 이만열 위원장이 로또 기금 지원을 받아내어 문화재청과 함께 개인이 갖고 있던 판권을 사서 무료 서비스를 하게 한 것이다.

인터넷 개통식 날 사회자가 실록은 왕조의 기록이자 조선시대 생활만사가 다 들어 있다고 하자 짓궂은 한 청중이 ‘개고기’가 나오냐고 물었다. 이에 검색해 보니 기사가 모두 8개 떴다. 그중 『중종실록』 29년(1534) 9월 3일자에는 권력자인 김안로는 개고기를 좋아해서 그에게 아부하는 자는 맛있는 개고기를 상납했다며 나라 풍속에 여름에 개고기를 삶아서 먹는 것은 가장(家獐)이라고 하고 개고기 구이는 견적(犬炙)이라고 한다는 주석까지 달렸다. 『조선왕조실록』은 실로 국보 중의 국보이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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