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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진중권의 퍼스펙티브

촛불 정권, 연성 독재로 전락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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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한국의 리버럴 정권이 내면의 권위주의를 드러내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기사의 제목이다. 자칭 ‘촛불정부’의 변질을 외신에서도 주목하나 보다. 기사는 ‘더 개방적이고 반대의견에 관대한 정부’를 만들겠다던 문재인 정권이 반대 의견을 참지 못해 소송을 남발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정권의 ‘내면의 권위주의’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법의 지배와 법에 의한 지배 착각 #민주 표방하며 권위주의적 통치 #국민은 법 아래, 자신들은 법 위에 #편의대로 반자유주의 법률 쏟아내

촛불정권의 권위주의 통치

문 대통령은 의료계 파업에 “원칙적 법 집행을 통해 강력히 대처하라”고 지시했다. 어조가 매우 권위주의적이다. 7년 전 경찰이 철도파업을 주도한 민주노총 간부의 체포영장을 집행했을 때는 이렇게 말했었다. “왜 이리도 강경한가? 대화와 협상이 먼저지 공권력이 먼저여서는 안 된다. 공권력 투입은 정부의 소통과 대화능력의 부족을 보여줄 뿐이다.”

현대국가에서도 민주주의는 파괴될 수 있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저자 레비츠키와 지블랫 은 그 일이 정권에서 법원·검찰·국세청 등 심판 역할을 하는 기관을 장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지적한다. 심판을 매수하는 방식인데, 이는 공직자나 비당원 관료를 해고하고 그 자리를 충신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정권의 충신들이 이들 기관을 장악하면 권력을 제어하는 수사와 고발을 차단함으로써 잠재적 독재자에게 도움을 준다. 그 경우 대통령은 마음대로 법을 어기고, 시민권을 위협하고, 심지어 수사나 검열의 걱정 없이 헌법을 위반한다. 그리고 정권의 입맛에 맞는 판사로 사법부를 채우고 법 집행기관의 힘을 무력화함으로써 처벌의 두려움 없이 권력을 휘두른다.”

지금 그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검찰총장과 감사원장과 판사들이 정권의 타깃이 되었다. 검찰총장의 손발이 잘리고, 조직은 온통 장관 라인으로 채워졌다. 여당 의원이 대놓고 감사원장에게 정권의 코드에 맞추라고 요구한다.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향에 대해서 불편하고 맞지 않으면 사퇴하세요.” 심지어 총리가 8·15 집회를 허용했다고 판사를 공격한다.

법의 위에 서 있는 사람들

그래픽=최종윤

그래픽=최종윤

“자유민주주의는 법의 지배를 통해서 실현된다.” 검찰총장이 보다 못해 한마디 하자, 민주당은 이를 ‘반정부 투쟁 선언’으로 규정하고 나섰다. 법의 지배를 말했다고 반정부로 몰아가니, 이 정권은 법치에 반대하는 모양이다. 신정훈 의원이 호들갑을 떤다. “일반인의 입장에서 ‘법의 지배’ 같은 무서운 말들은 꽤 위험하게 들린다.”

원희룡 제주지사가 꼬집고 나섰다. 혹시 ‘법의 지배’(rule of law)를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로 착각한 게 아니냐고. 원 지사의 말대로 ‘법의 지배’는 사회 구성원은 누구나 법의 지배를 받는다는 민주주의 사회의 원칙, ‘법에 의한 지배’는 법을 통치수단으로 악용하는 권위주의 정권의 반칙이다. 교양 없는 의원이 이 둘을 혼동한 것이다.

이게 한 개인만의 문제일까? 둘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실은 정권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 문재인 정권은 ‘법의 지배’를 ‘법에 의한 지배’로 착각하고 있다. ‘법에 의한 지배’란 (1) 통치자가 법 위에 서 있는 존재로서 (2) 제 편의대로 법을 만들어 집행할 권한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개념이다. 이 두 요소가 문재인 정권에 고루 나타난다.

먼저, 그들은 법의 위에 있으려 한다. 조국 수사는 저항에 부딪혔다. 증권범죄 합수단은 해체됐다. 권력에 대한 수사는 중단됐고, 비리에 칼을 댄 검사들은 좌천됐다. 이른바 ‘검찰개혁’은 철저히 법의 지배에 ‘예외’를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국민은 법 아래 놓고, 자기들은 법 위에서 그것의 지배를 피해 가려는 것이다.

법 위에 선 존재라는 그들의 특권의식은 시각적으로도 확인된다. 선거 개입 사건의 피의자들은 검찰의 소환에 불응했다. 최강욱 의원은 재판을 받다가 자리를 뜨려 했다. 이수진 의원은 법정에서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법관을 탄핵하겠다고 한다. 이 모든 방자함은 자신들이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자신감에서 나온다.

정치적 무기로서 입법

‘법에 의한 지배’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두 번째 요소, 즉 법을 통치자의 의지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에서다. 이는 민주당 의원들이 추진하는 일련의 비(非)자유주의적 혹은 반(反)자유주의적 입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칭 ‘리버럴’ 정당의 의원들이 줄줄이 자유주의에 반하는 법률들만 쏟아낸다. 얼마나 해괴한가.

대표적인 예가 바로 손해액의 3배에 달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명기한 정청래 의원의 법안이다. 이 법은 언론의 관심을 못 받는 일반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 법이 보호하는 것은 그 동정이 언론에 보도되는 권력자들뿐. 언론계에서는 한목소리로 이 법이 헌법적 가치인 언론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훼손한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당론으로 채택된 역사 왜곡 처벌법은 위헌의 소지가 다분하다. 사실을 사실로 확정하는 작업은 사상의 자유시장에 맡겨야 하며, 확정된 사실도 반대 사실의 도전을 허용해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다. 이 민족보안법은 국가보안법 못지않게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것이다. 악의적 날조자들은 굳이 이 법이 없어도 그동안 처벌을 받아왔다.

이수진 의원은 국립묘지에서 친일 인사의 묘를 파내는 ‘파묘법’을 발의했다. 우리의 굴곡진 역사에는 긍정과 부정의 이중 규정을 받는 인물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들에 대한 보훈을 어떻게 할지는 학계나 시민사회의 합의로 정할 일. 한쪽의 견해를 법으로 강요하면 선거 결과에 따라 안장과 파묘를 반복하는 해프닝이 벌어질 것이다.

이 반(反)자유주의적 입법에 정점을 찍은 것은 황운하 의원의 의사 강제동원법이다. 민간인 의사들을 ‘재난관리자원’으로 규정해 국가 재난시 강제 징발하겠다고 한다. 신현영 의원의 법안에는 심지어 징발한 의료인력을 유사시 북한에 파견하는 내용까지 담겨 있다. 민간인을 군인 취급하는 셈인데, 이는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군국주의적 발상이다.

사법부를 진압하라

박주민 의원은 공수처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야당의 비토권을 무력화하는 내용이다. 공수처가 정권 보위를 위한 게 아니라는 근거로 자기들이 내세워 온 게 야당의 비토권인데, 그것마저 없애겠다는 것이다. 공수처를 대놓고 정권 보위기관으로 만들려는 모양이다. 의원입법이 통치자의 의지를 억지로 관철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원욱 의원은 광화문 집회를 허용한 판사의 이름을 따 ‘박형순 금지법’을 발의했다. 입법으로 사법부의 판결까지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판결이 문제라면 법 비판으로 풀 일. 법률이 문제라면 그 법에 따른 이를 ‘판새’라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두 가지를 다 한다. 입법을, 방역실패의 책임을 판사에 떠넘기는 대중 선동의 도구로 악용한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훨씬 더 우선적”이란다. 국민의 헌법적 권리를 제약하는 법은 늘 ‘생명과 안전’을 명분으로 내세워 왔다. 국가보안법을 생각해 보라. 과거에 그들은 테러방지법 막겠다고 필리버스터까지 했었다. 그때는 왜 ‘국민의 생명과 안전’보다 통신의 자유를 앞세웠을까? 이렇게 그들은 자기들의 적을 닮아간다.

리걸 마인드와 운동 마인드

민주당 의원들이 내놓은 법안들은 하나같이 해괴하기 짝이 없다. 거기에 일관된 특징이 있다면, 반(反)자유주의적이며 심지어 전체주의적이라는 점. 그들은 자신을 법치의 예외로 놓고 입법을 통치의 무기로 휘두른다. 이것이 ‘법에 의한 지배’다. ‘민주’를 표방해 온 정부가 어느새 권위주의 정권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들이 만든 법은 하나같이 위헌의 소지를 안고 있다. 입법을 ‘리걸 마인드’(legal mind)가 아니라 ‘운동 마인드’로 하기 때문이다. ‘리걸 마인드’는 어느 정권이 들어서도 공정하게 운영될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개혁으로 본다. 반면 ‘운동 마인드’는 제 대의를 관철할 수 있다면 시스템 따위는 좀 망가뜨려도 된다고, 아니, 그래야 한다고 본다.

검찰·감사원·법원·언론 등 감시와 견제의 기관들은 그들의 공격 대상이 됐다. 그 잘난 ‘개혁’으로 민주주의의 근간인 권력분립이 무너지고 있다. 이게 촛불을 들고 우리가 원했던 나라인가? 민주당은 리버럴하지 않다. ‘내면의 권위주의’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그들은 이미 독재자, 이른바 ‘연성 독재자들’이다. 촛불은 배반당했다. 시민은 기만당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