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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인사이드]미군이 포기한 불시착 전투기 한국이 살려냈다

중앙일보

입력

6ㆍ25전쟁 중이던 1951년 9월 수원 부근에 불시착한 F-80 전투기. F-80은 미국 최초의 제트전투기로 한국전쟁을 통해 실전에 데뷔했다. [한국전쟁유업재단]

6ㆍ25전쟁 중이던 1951년 9월 수원 부근에 불시착한 F-80 전투기. F-80은 미국 최초의 제트전투기로 한국전쟁을 통해 실전에 데뷔했다. [한국전쟁유업재단]

1950년 6월 25일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공군은 일본의 여러 비행장에 활동 거점을 뒀다.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B-29 폭격기처럼 저 멀리 오키나와에서 출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작전기는 한반도와 가까운 규슈 일대에서 발진했다. 부대를 한반도로 옮겨오기에는 많은 준비와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급박한 상황을 고려해 일단 그렇게라도 운용해야 했다.

스미스 특임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지상군 참전이 시작된 후, 좀 더 가까운 곳에 기지를 설치할 필요성이 제기되자 일부 부대를 대구비행장에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활주로 상태가 몹시 불량해서 당시 미 공군의 주력기인 F-80을 운용하기가 어려웠다. 고심 끝에 보수를 마칠 때까지 제트전투기가 등장한 후 이선으로 물러난 F-51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운용 주체로 한국 공군이 선정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F-51 전투기에 탑승한 딘 헤스 제6412부대장. 그는 조종사 양성을 이끌어 한국 공군의 초석을 놓았다. 하지만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더욱 유명하다. [wikipedia]

한국전쟁 당시 F-51 전투기에 탑승한 딘 헤스 제6412부대장. 그는 조종사 양성을 이끌어 한국 공군의 초석을 놓았다. 하지만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더욱 유명하다. [wikipedia]

이에 따라 한국 공군은 7월 초, 10여 기의 F-51을 인수했으나 그동안 훈련기만 다뤄 본 상태였기에 당장 전투에 투입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단독으로 출격이 가능하도록 교육을 먼저 하기로 했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 공군의 실질적인 시작인 ‘바우트 원(Bout One)’계획이었다. 이때 훈련 목적의 제6412부대를 이끈 인물이 전쟁고아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딘 헤스(Dean Hess) 대령이다.

하지만 대구에 자리 잡은 직후 북한군이 낙동강 일대까지 밀고 내려오자 제6412부대는 안전을 위해 후방으로 기지를 옮겨야 했다. 이때 새로 전개한 곳이 진해비행장이었다. 그런데 말이 비행장이지 활주로의 길이도 짧았고 일본이 한반도에서 물러난 후 방치된 상태였다. 8월 초에는 전라도를 거쳐 남해안을 따라 동진하던 공산군이 마산 인근까지 나타나 다시 위협을 받았으나 다른 대안이 없었다.

부단한 노력으로 한국공군은 1951년 10월부터 단독 출격할 수 있을 만큼 조종사와 정비사들의 역량을 갖추는 데 성공했다.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은 1950년 10월 2일 F-51 무스탕 전투기를 타고 첫 출격했으며 1952년 1월 11일 한국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 기록을 수립했다. 비행을 마치고 활두로에 도착하자 동료 조종사와 정비사가 무등을 태우며 기록 수립을 축하하고 있다. [공군]

부단한 노력으로 한국공군은 1951년 10월부터 단독 출격할 수 있을 만큼 조종사와 정비사들의 역량을 갖추는 데 성공했다.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은 1950년 10월 2일 F-51 무스탕 전투기를 타고 첫 출격했으며 1952년 1월 11일 한국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 기록을 수립했다. 비행을 마치고 활두로에 도착하자 동료 조종사와 정비사가 무등을 태우며 기록 수립을 축하하고 있다. [공군]

이런 악조건에서도 훈련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작전에 나갔던 미 공군의 F-80 전투기가 일본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진해에 불시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조종사는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고 구조되었지만, F-80은 돌바닥과 다름없던 거친 활주로에 동체 착륙하면서 엄청난 손상을 입었다. 조사에 나선 미군 정비사들은 파손 정도가 심각하다며 기체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우리나라 정비사들이 나섰다. F-80이 한국 공군에게는 아직 언감생심이었던 제트전투기여서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이었다. 어차피 더 망가뜨려도 문제가 없는 기체였기에 정비 훈련을 하기에 좋은 기회였다. 미군은 교육생인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냐며 비웃었다. 변변한 장비도 없던 그들은 수동식 작키를 이용하여 조금씩 동체와 땅바닥의 틈을 벌려 나무를 일일이 괴어가며 기체를 들어 올렸다.

2015년 6월 23일 김 전 총장은 원주 공군기지에서 40년 만에 조종복 입고 최초의 국산 전투기 FA-50에 탑승해 기념 비행을 가졌다. 제8전투비행단 103전투비행대대 조종사들이 무등을 태워 100회 출격 당시 축하받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공군]

2015년 6월 23일 김 전 총장은 원주 공군기지에서 40년 만에 조종복 입고 최초의 국산 전투기 FA-50에 탑승해 기념 비행을 가졌다. 제8전투비행단 103전투비행대대 조종사들이 무등을 태워 100회 출격 당시 축하받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공군]

중심이 맞지 않으면 동체가 부러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천천히 기체의 자세를 맞추고 랜딩 기어를 내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며칠간 수작업으로 휘고 파인 동체와 주익을 곧바로 폈다. 뒤에서 지켜보던 미군들은 한국 정비사들의 실력에 경탄을 금치 못하고 해당 전투기 운용부대에 연락을 취했다. 그렇게 손실로 여기던 값비싼 전투기가 회수되어 다시 작전에 투입될 수 있게 되었다.

보잘것없는 수준으로 평가받던 한국 공군의 위상은 급격히 향상되었고 미군들도 고급 기술 전수에 망설이지 않았다. 전쟁 중반이 되었을 때는 자력으로 정비하고 단독으로 작전을 펼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덧 고성능 국산 전투기의 개발까지 진행할 정도가 되었다. 전시에도 쉬지 않고 부단히 연구하며 터득한 수많은 노력이 밑거름되었기에 어려운 도전을 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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