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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 좇아 월북한 부친, 자유 찾아 탈북한 아들…기구한 父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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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사회주의 평등 이념을 좇아 1950년 월북했지만 좌절한 남로당원 이포구 씨(왼쪽). 그의 아들 이민복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은 남한 삐라를 보고 자유를 찾아 탈북했다고 한다. [사진 이민복]

사회주의 평등 이념을 좇아 1950년 월북했지만 좌절한 남로당원 이포구 씨(왼쪽). 그의 아들 이민복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은 남한 삐라를 보고 자유를 찾아 탈북했다고 한다. [사진 이민복]

이민복(63)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은 2003년 민간인 최초로 북한에 전단(삐라)을 보낸 '대북 전단의 원조'다. 경기도 북부의 한 농촌 마을에서 이 단장을 만났다.
 올해는 6·25전쟁 70주년이다. 분단과 6·25전쟁의 비극으로 뒤얽혀 있는 기구한 이씨 부자(父子) 스토리를 소개한다.
 아버지는 남로당원으로 평등 사상에 심취한 골수 '빨갱이'였고 1950년 6·25 와중에 자진 월북했다. 57년 북에서 태어난 이 단장은 우연히 남한 전단을 보고 북한 체제에 환멸을 느낀 뒤 자유를 찾아 목숨 걸고 탈북했다.
 부친(이포구·1927~1985)은 전북 익산시 함라면 출신이다. 5형제 중 막내였던 부친은 유일하게 초등학교를 졸업해 집안에서 똑똑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일제의 강제징용을 가까스로 모면했다.
 45년 해방 직후 38선으로 분단되면서 북한은 남한 적화를 위해 간첩을 대거 남파했다. 익산에는 팔로군 출신 김복동이 내려와 똑똑하고 말도 잘하던 부친을 포섭했다. 자수성가해 부농 소리를 듣던 큰아버지를 비롯한 형제들은 공산주의 평등 사상에 빠진 막내에게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 같다"며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1954년 10월 중국 베이징 톈안먼 성루에 올라 중국 건국 5주년 열병식을 지켜보는 김일성(왼쪽)과 마오쩌둥(오른쪽).

1954년 10월 중국 베이징 톈안먼 성루에 올라 중국 건국 5주년 열병식을 지켜보는 김일성(왼쪽)과 마오쩌둥(오른쪽).

 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단독 총선이 치러지면서 남로당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부친은 무덤을 아지트 삼아 활동했다.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키고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면서 세상이 달라졌다.
 인민군 6사단이 점령한 전라도에서 부친은 익산군당 선전부장으로 발탁돼 지프를 타고 다닐 정도로 '벼락출세'했다. 세상이 바뀌자 옛 머슴과 빈농들은 "무산계급 세상이 왔다"며 지주와 부자들을 찾아다니며 죽이려 했다.
 실제로 각지에서 학살이 자행됐다고 한다. 하지만 부친은 "동네 사람을 죽이는 것은 가족을 죽이는 것과 같다. 땅을 나눠 줄 테니 농사나 잘 지으라"며 무마해 고향에서는 학살이 없었다고 한다.
 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이 180도 바뀌자 세상이 또 바뀌었다. 부친은 아내와 딸을 남겨두고 인민군 6사단을 따라 태백산맥을 타고 북으로 올라갔다. 휴전 이후 부친은 남한이 지척인 황해도 서흥에 정착해 재혼했다. 부친이 원유공급소 사장으로 일하며 자식이 5남매로 불어났지만, 위기가 또 찾아왔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 기간에 대화하는 펑더화이 중국 사령관(왼쪽)과 김일성.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 기간에 대화하는 펑더화이 중국 사령관(왼쪽)과 김일성.

 67년 진공관 라디오로 남한 방송을 들었다고 이웃이 고발하는 바람에 부친은 갑자기 끌려갔다. 열 살 때 현장을 목격한 이 단장은 "60년대 북한에서는 남한 방송을 못 듣도록 라디오 채널을 고정했다. 남한 라디오를 들으면 정치범으로 몰아 처벌했다. 거짓말로 정권을 유지해오다 보니 북한은 외부 방송을 예나 지금이나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중앙당 간부로 있던 친인척이 빨치산 출신 임춘추 정치국원(후에 부주석)을 통해 부친의 구명 운동에 나섰다. 남로당으로 활동한 부친의 기록을 임춘추가 중앙당 문서과에서 찾아낸 뒤에야 부친은 간첩 혐의를 벗었다. 하지만 이후 출셋길은 사실상 막혔다.
 이 단장은 두뇌가 좋은 부친을 닮아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다. "쌀은 공산주의"라고 했던 김일성 교시에 마음이 움직여 쌀 문제만 해결되면 공산주의가 실현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공대 대신 평안남도 은산 농업전문학교에 진학했다. 이어 79년 남포농업대학 연구소로 옮겼고 82년 국가농업과학연구원 옥수수연구소에서 깜부깃병 전문가로 일했다.

이민복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이 남로당 출신 부친의 이력을 설명하고 있다. 장세정 기자

이민복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이 남로당 출신 부친의 이력을 설명하고 있다. 장세정 기자

 85년 어느 날 새벽 퇴근길에 이 단장은 들판에서 통곡하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남조선 간첩이라는 의심을 받고 끝없는 감시를 당하던 부친은 "정치는 최대 협잡"이란 말을 남기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 단장은 그해 깜부깃병 퇴치 임무를 받아 양강도 김정숙군 협동농장경영위원회 연구원으로 파견 가서 91년 탈북 때까지 일했다. 인민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밤낮으로 연구했다.
 90년 5월 중앙당에 개인농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1호 편지'를 보냈다. 김일성이 받아보는 편지였다. 이 단장은 개인농과 집단농의 작황 비교 실험을 했는데 개인농이 5배나 많았다. 편지에는 전국에 개인농을 도입하면 수확이 2배는 늘어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썼다. 그런데 한동안 아무 반응이 없었다.
 과학원 국장이 현지에 내려와 "중앙당이 개인농은 수정주의라며 조사를 진행했다. 당신을 정치범으로 몰려다 순수한 과학자의 행동으로 봐주기로 했으니 더 고집부리지 말라"고 지적했다.
 이 단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김일성은 평생 인민에게 "이밥(쌀밥)과 고깃국을 먹게 해주겠다"고 선전했다. 식량 생산이 급증하면 만세를 불러야 할 텐데 왜 이색(반동) 사상으로 보려 하나. 도대체 정치가 뭔데 하는 회의도 들었다. 인민들 배부르게 하는 게 정치 아닌가. 김일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

'민간 대북 삐라의 원조'인 이민복씨는 "북한 주민은 식량과 외부 정보 모두에 굶주리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옥수수 전문가였던 그가 경기도 북부의 한 농촌 마을에서 옥수수를 살펴보고 있다. 장세정 기가

'민간 대북 삐라의 원조'인 이민복씨는 "북한 주민은 식량과 외부 정보 모두에 굶주리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옥수수 전문가였던 그가 경기도 북부의 한 농촌 마을에서 옥수수를 살펴보고 있다. 장세정 기가

 90년 8월 강원도 철원에 출장갔다가 우연히 떨어진 남한 전단을 봤다. 내용을 보니 남한에는 전화기가 집집마다 있다고 자랑했다. 폴란드 노조 봉기와 헝가리 폭동 등 동유럽 도미노 붕괴 소식도 들어 있었다. 특히 6·25전쟁이 남침이라는 흐루쇼프 회고록과 6·25 당시 인민군 2군단 이학구 작전참모(대좌)의 증언도 들어 있었다.
 전단을 본 뒤부터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이 항일 투쟁의 영웅이고, 미제와 남조선의 북침 도발을 격퇴하고 인민을 살려낸 생명의 은인이라고 철석같이 믿어 왔다. 그런데 남침이라니? 처음엔 믿기지 않아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자꾸 의구심이 생겼다. 북침이라면 어떻게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했을까. 생존한 초기 참전자를 조용히 만나 진상을 들었다. 이 무렵 이 단장은 남북한 증오의 원천인 6·25의 진실을 북한 주민들에게 알려야 증오가 사라져 평화통일이 올 거라 확신했다. 그는 탈북에 성공하면 북한에 삐라를 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단장은 "삐라 살포는 탈북의 핵심 동기이자 나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6·25의 진실을 알고부터 과학연구보다는 바깥세상을 알려고 애를 썼다. 북·중 국경지대를 몰래 넘어가서 개혁·개방을 실험 중이던 중국이 북한보다 잘사는 모습을 목격했다. 한·중 수교(92년 8월) 이전인데도 남한에 고향 방문을 다녀온 조선족들이 남한의 발전상을 생생하게 전했다.
 "남한 농민들이 식사 후에 과일을 먹더라." "조상을 공경하고 묘에 참배 가는데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식량과 외부 정보 모두에 굶주린 북한 사람들이 듣기에는 경천동지할 사실들이었다.

'김씨 왕조 체제'를 구축한 북한은 세습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혈안이라 진정한 개혁-개방을 거부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사진 왼쪽부터)

'김씨 왕조 체제'를 구축한 북한은 세습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혈안이라 진정한 개혁-개방을 거부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사진 왼쪽부터)

 90년 11월 1차 탈북에 실패한 뒤 91년 6월 압록강을 성공적으로 건넜다. 옌볜(延邊) 조선족 자치주에서 1년을 머물며 KBS 사회교육방송을 청취했다. 92년 6월 러시아로 넘어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95년 2월 18일을 한국 땅을 밟았다.
 이 단장의 탈북을 계기로 국내 언론이 '탈북자'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탈북 과정에서 이 단장은 "사회주의는 사기주의, 공산주의는 공상주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공산주의 평등 이념을 좇아 북으로 간 아버지를 둔 아들이 40여년 뒤에 자유를 찾아 탈북한 뒤 내린 뼈저린 결론이었다.
 이 단장은 "북한 사회에 삐라는 원자폭탄보다 더 위력적"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중성자가 핵을 뚫고 들어가 핵분열을 일으키는 것처럼 북한 사람들에게 6·25전쟁의 진상만 제대로 알려줘도 북한 사회는 내부에서 무너진다"며 대북 전단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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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이민복, 거대 여당의 '대북전단 금지법' 막아냈다

이민복 대북풍선단장은 3일 국회 외통위에 출석해 "현행법으로도 대북 전단 불법 살포는 막을 수 있다. 진짜 전문가들이 조용하게 날리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고 여당은 표결을 강행하지 못했다. 장세정 기자

이민복 대북풍선단장은 3일 국회 외통위에 출석해 "현행법으로도 대북 전단 불법 살포는 막을 수 있다. 진짜 전문가들이 조용하게 날리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고 여당은 표결을 강행하지 못했다. 장세정 기자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은 송영길(더불어민주당)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이 발의한 법안이다. 지난 6월 북한 김여정이 대북 전단을 맹비난하자 여당이 법안 제정에 나섰고 야당은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김여정 하명법'이라 비판했다.
 지난 3일 열린 국회 외통위에서 이 법안은 여당이 마음만 먹으면 숫자(12대 9)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게다가 여당은 인민군 군관(장교) 출신 탈북자를 부르고, 탈북 인권 단체를 비난하는 여성 변호사까지 동원했다.
 그런데 외통위에 이민복 단장이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고 기적 같은 반전이 일어났다. 이 단장은 "접경 지역 주민 안전이 중요하니 이를 고려해 가스안전 자격증을 갖춘 전문가가 조용히 제대로 전단을 날리면 효과는 좋으면서 아무 탈이 없다"고 역설했다.
 이어 "일부 대북 단체처럼 공개적으로 언제 어디서 전단을 날린다고 떠들면 현행 경찰직무집행법으로 막으면 되고 풍선 사고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현행 가스 안전법을 적용하면 된다"며 대안까지 제시했다. 그러면서 "불법을 막을 현행법이 충분히 있는데도 이를 제대로 집행하지 않은 정부의 직무유기가 더 문제"라고 꼬집었다.
 논리적으로 차분히 근거를 제시한 그의 지적에 회의장은 압도됐다. 결국 송영길 위원장은 표결 강행 대신 안건조정위원회(논의 기한 90일)에 넘겼다. 거대 여당이 숫자로 밀어붙이려다 막판에 군색해지자 꼬리를 내린 셈이었다.
 조태용 미래통합당 의원은 "이민복 단장이 있었기에 그날 분위기를 바꿀 수 있었다"며 "(임대차 3법 등을) 숫자로 밀어붙이던 거대 여당에 처음 브레이크가 걸린 사례였다"고 평가했다.
 이 단장은 "북한은 지금도 인터넷 공간에서 대남 전단을 무차별적으로 살포하고 있다"며 "남한은 표현의 자유라는 엄청난 무기가 있는데 이 카드를 스스로 버리려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지적했다.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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