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기생 1000명…‘흥청망청’ 유래한 연산군의 주색잡기

중앙일보

입력 2020.08.30 13:00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24) 

연산군은 성종의 장남으로 생모는 폐비 윤씨이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집권 초기에는 국정을 잘 다스려 성군의 기질이 보였는지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렸던 왕이다. 그러나 생모의 죽음에 얽힌 비극을 알게 된 이후 왕은 지나치게 감성적인 행태로 정사에 소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죽음에 관련된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이 일이 있은 뒤 연산군의 광폭한 행동은 심해져, 사람을 죽이는 일과 마시고 노는 일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1505년 10월 2일 『연산군일기』에는 “갑자년 이후의 하교(下敎)가 흥청·운평에 관한 일이 아니면 사람을 벌하고 죽이는 일이라, 인심이 날로 떠났다” 는 기사가 있다. 갑자사화 이후에 창기로서 얼굴이 예쁜 자를 대궐 안으로 뽑아 들이니 처음에는 백 명 정도였던 것이 나중에는 만 명이나 되었다. 연산군 11년(1505년) 6월, 연산군은 전국 팔도에서 미녀와 튼튼한 말을 구하기 위해 지방 관리인 채홍준사(採紅駿使)를 파견했다. 사대부의 첩이나 양인의 아내와 딸, 노비, 창기 중에서 닥치는 대로 여자들을 징발했다.

기생의 칭호를 고쳐 운평(運平)이라 했는데 대궐 안에 들어온 자는 흥청(興淸), 계평(繼平), 속홍(續紅)이라 하고 왕을 가까이 모신 자는 지과흥청(地科興淸), 임금과 동침한 자는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하였다.

연산군은 집권 초기에는 국정을 잘 다스려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렸던 왕이다. 그러나 생모의 죽음에 얽힌 비극을 알게 된 이후 왕은 지나친 감성적인 행태로 정사에 소홀하기 시작했다. [사진 영화 '간신' 스틸]

연산군은 집권 초기에는 국정을 잘 다스려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렸던 왕이다. 그러나 생모의 죽음에 얽힌 비극을 알게 된 이후 왕은 지나친 감성적인 행태로 정사에 소홀하기 시작했다. [사진 영화 '간신' 스틸]

연산군일기 61권, 연산 12년(1506) 3월 17일 정유 8번째기사

경회루 못가에 만세산을 만들어 꾸미게 해 흥청 등을 모아 놀다

경회루 못(池)가에 만세산(萬歲山)을 만들고, 산위에 월궁(月宮)을 짓고 채색 천을 오려 꽃을 만들었는데, 백화가 산중에 난만해 그 사이가 기괴 만상이었다. 그리고 용주(龍舟)를 만들어 못 위에 띄워 놓고, 채색 비단으로 연꽃을 만들었다. 그리고 산호수(珊瑚樹)도 만들어 못 가운데에 푹 솟게 심었다. 누(樓) 아래에는 붉은 비단 장막을 치고서 흥청·운평 3천여 인을 모아 노니, 생황(笙簧)과 노랫소리가 비등하였다.

원래 연산군 조의 왕실 기생 흥청이란 이름은 사악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으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흥청에서 유래한 흥청망청이란 단어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흥에 겨워 마음껏 즐기며 거드럭거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또는 돈이나 물건 따위를 아끼지 않고 마구 쓰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연산군이 서울 근교로 놀러 갈 때 왕을 따르는 흥청의 수가 1000 명씩 되었고, 날마다 계속되는 잔치에도 흥청과 운평이 동원되었다. 연산군은 이 수많은 기생과 궁궐에서 함께 놀이를 즐기고 주연을 베풀면서 국고를 탕진하고 나라가 망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흥청으로 인해 망국이 든다는 뜻에서 오늘날 우리가 쓰는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연산군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돼 강화도 교동에 귀양 갔다가 그해 11월 병사했다.

화마로부터 경회루 지켜낸 불가사리

경회루로 건너가는 3개의 돌다리에는 벽사의 의미를 가진 동물상이 새겨진 엄지 기둥을 놓았다. 이중 가장 북쪽의 자시문에서 들어가는 돌다리 기둥에는 불가사리를 조각해 놓았다. 아직도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총탄을 맞은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다. 경회루가 전쟁 중에도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불가사리가 전쟁의 화기를 온몸으로 막아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가사리는 원래 불을 제압하는 신령한 동물이 아니던가. 새삼 경회루 불가사리의 충절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아야겠다. 경회루를 받치고 있는 기둥에도 총탄 흔적이 여기저기 있는 것을 시멘트로 발라 대충 감추고 있다.

대원군이 경회루를 복원할 때에는 기둥에 용을 조각하지 않았다. 대신 대원군은 놋쇠로 만든 잠룡 두 마리를 경회루 못 속에 넣었는데 이는 오행의 금생수(金生水.쇠가 물을 살린다)에 해당한다. [사진 pixabay]

대원군이 경회루를 복원할 때에는 기둥에 용을 조각하지 않았다. 대신 대원군은 놋쇠로 만든 잠룡 두 마리를 경회루 못 속에 넣었는데 이는 오행의 금생수(金生水.쇠가 물을 살린다)에 해당한다. [사진 pixabay]

경회루를 받치고 있는 기둥은 모두 48개로 건물을 받치고 있는 민흘림기둥은 바깥의 방주(方柱)와 안쪽의 원주(圓柱)로 구분된다. 원래 성종 조에 경회루를 수리할 때 바깥 방주에 용을 조각해 물에 비친 용의 그림자가 장관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득공은 복원되기 전 돌기둥만 남은 경회루터를 둘러보았을 때 바깥기둥에 남아 있는 구름과 용 조각의 형상을 발견하고 그 장관에 감탄했다. 연못물에 비친 기둥의 용 조각이 일렁이는 물결에 살아있는 용의 모습을 만들어 냈을 풍경을 상상하면 유득공과 유구국 사신의 감탄을 공감할 수 있다.

대원군이 경회루를 복원할 때에는 기둥에 용을 조각하지 않았다. 대신 대원군은 놋쇠로 만든 잠룡 두 마리를 경회루 못 속에 넣었는데 이는 오행의 금생수(金生水.쇠가 물을 살린다)에 해당한다. 물과 불을 능히 다스리는 용을 넣은 것은 생성되는 물로써 불을 제압하려는 의미이다.

정학순이 적은 ‘경회루전도’에 의하면 물과 불을 다스리는 용 두 마리를 경회루 연못 북쪽에 넣었는데, 북쪽에 용을 넣은 것은 생성되는 물로 불을 제압하려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1997년 11월 경회루 연못 준설작업 도중 놋쇠 용 조각 하나가 출토되어 현재 국립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물을 채운 연못에 새로 만든 2개의 용 조각을 넣었다고 한다.

경회루 연못의 크기는 남북 113m 동서 128m이고, 연못에는 두 개의 작은 인공 섬을 만들고 소나무를 심었다. 섬을 돌아가는 물길을 만들어 물을 썩지 않게 하는 당주다. 현재 경복궁의 서북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물길은 경회루 연못으로 모아진다. 경회루 연못은 스스로 솟는 샘이 있고 물길이 빠지는 구조로 물의 순환이 자연으로 이루어지는 600년을 살아 숨 쉬는 연못이다. 경회루 연못에서 넘쳐흘러나가는 물은 영추문 안쪽 집수장에서 처리된다. 지금 경복궁 서편의 효자동 일대뿐 아니라 서울의 도로가 개천을 그대로 살려 두었더라면 경회루의 물길은 청계천을 거쳐 한강으로 흘렀을 것이다. 복개된 도로 밑 하수로 흐르는 물길이 옛 기억을 할지 모르겠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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