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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독일 헌법에는 ‘양심’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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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집회 내용이나 규모 등과 상관없이 폭넓게 금지하는 것은 모든 집회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정부의 강경 대응에 인권침해 문제를 느끼고 있다. 비판 기능이 약화하기 때문에 부당한 처우가 있어도 목소리를 낼 수 없는 환경이 초래될까 우려하고 있다.”

감염 예측 못했다고 판사 비난 #자의적 법 해석 강요하는 행위 #사법 흔들리면 기본권도 위험

8·15 집회에 대해 비난받고 있는 태극기부대의 목소리가 아니다. 지난 5월 15일 한·일 공익변호사 화상회의에서 나온 민변 소속 서채완 변호사의 말이다. 주제는 ‘코로나19와 인권’. 서 변호사는 한국마사회의 비리를 고발하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산경마공원 문중원 기수의 추모 분향소를 종로구청이 강제 철거하자 문제를 제기했다.

먼저 밝혀 두자. 방역을 뒤흔든 극우 단체의 집회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공동체 안전을 위협한 책임은 엄하게 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를 허용했다는 이유로 판사를 공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일반인이 판결에 아쉬움을 표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총리와 장관, 여당 국회의원 등 권력자가 공공연히 판사를 비난하는 건 차원이 다르다. 총리는 국회에서 질문을 받았다 해도 “개인적으론 아쉬움이 있지만 삼권분립 정신상 의견을 밝히는 것은 적절치 않다” 정도로 넘어갔으면 충분했다. 법무부 장관이 판사를 ‘책상물림’ 정도로 모욕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권력이 평소에 사법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들은 서울행정법원의 결정문에서 ‘책상머리의 단견’을 읽었는지 몰라도 나는 ‘기본권에 대한 고민’을 읽었다. 법원은 집회금지 집행정지 신청이 들어온 10건의 집회 중 8건을 기각하고 2건을 인용했다. 100명 정도 참가할 것이라는 신고 내용대로라면 방역에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봤다. 그때까지 야외 집회에서 코로나19 확산 사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서울·경기 지역의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조치도 실시되기 전이었다. 재판부는 “기본권을 제한하려면 (감염 예방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 무엇인지 탐구해야 하는데, 서울시는 애초부터 집회 자체를 금지했을 뿐 구체적인 방법 제한을 통한 위험성 감소를 시도하지 않았다”고 했다. 한마디로 행정 편의주의만 있지 기본권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 집회 양상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고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결과론이다. 만일 민주노총 집회를 막연히 “폭력화할 위험이 있다”며 불허했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민주당 이원욱 의원은 판사 이름까지 따 “감염병 위험이 있을 땐 집회 시위는 금지한다”는 내용의 법을 발의했다. 판사를 모욕하려는 속셈이겠으나, 법을 새로 만들겠다는 것 자체가 해당 판사의 판단이 위법한 것은 아니었음을 역설적으로 말해 준다. 판사의 잘못이 있다면 공권력이 신고 내용대로 집회를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 믿은 순진함일 게다.

결과가 아쉽다고, 혹은 일반인의 법 감정에 맞지 않는다고 법리에 따라 내린 판단을 권력이 비난하는 것은 위험하다. 정치에 대한 사법의 복속을 요구하는 행위다. 인권의 역사는 법의 자의적 해석을 막아 온 역사다. 독일 기본법(헌법)에는 ‘양심’이 없다. 제97조는 “법관은 독립해 법률에만 구속된다”고 규정한다. ‘법과 양심에 따라 심판한다’는 우리 헌법과 대조적이다. 초안에는 ‘양심’이 있었으나 논쟁 끝에 삭제됐다. 일말의 자의적 법 해석 소지도 남겨놓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건전한 국민감정’이라는 개념으로 법 정신을 파괴했던 나치 형법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코로나가 펼치는 낯선 세상은 마스크 없이는 다니지 못하는 거리뿐이 아니다.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공권력을 강조하고 기본권 제한을 말하는 풍경도 낯설기만 하다. 오늘은 방역이 기본권에 양보를 요구하지만, 내일은 어떤 거룩한 명분이 기본권을 흔들지 모른다. 사법 신뢰도 흔들린 지 꽤 됐지만 어쩌랴, 그래도 기댈 곳은 법인걸.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