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토종 맥주 보리가 외국산에 밀려나게 된 까닭

중앙일보

입력 2020.08.27 15:00

[더,오래] 황지혜의 방구석 맥주여행(50)

맥주 원료는 수입에 의존한다. 맥주에 당을 공급하고 곡물의 맛을 나게 하며 색깔을 결정하는 맥아는 대부분 외국산이다. 맥주의 향과 쌉쌀함을 내고 방부제 역할을 하는 홉도 수입산 비중이 100%에 육박하고, 맥아에서 추출한 당을 흡수해 알코올 발효를 하는 미생물인 효모 역시 국내산은 찾아보기 어렵다. 맥주의 4대 원재료인 맥아, 홉, 효모, 물 중 오로지 물만 토종이다. 정확히 말하면 국산 맥주는 수입 원료를 국내에서 가공한 것이다.

한 때 자급률이 100%에 이르렀던 맥아는 현재 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사진 황지혜]

한 때 자급률이 100%에 이르렀던 맥아는 현재 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사진 황지혜]

과거부터 맥주 산업에 수입 재료가 주를 이뤘던 것은 아니다. 불과 12년 전까지만 해도 국산 재료가 4분의1 이상 사용됐다. 맥주 보리와 홉의 재배는 일제에 의해 국내 맥주 산업이 태동한 1930년대를 전후해 시작됐다. 맥주용 보리는 일본으로부터 들어와 제주도와 충남 등에서 키우다가 6.25 전쟁 영향으로 재배가 중단됐다.

이후 1960년대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보리를 맥주 재료로 가공한 맥아도 국내에서 제조하게 됐다. 한때 맥아 자급률이 100%에 이르다가 맥주 소비량이 늘면서 국내 생산 맥아로는 모자라게 되자 수입을 시작했다. 점차 수입량이 늘기는 했지만 2008년까지만 해도 맥주 보리 자급률이 25%에 달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한・EU 자유무역협정(FTA), 한·미 FTA가 잇달아 체결되면서 국내 맥주 보리 재배 농가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상대적으로 값싸고 품질이 좋은 수입산이 밀려들어오면서 국산 맥주 보리가 설 자리를 잃은 것이다.

홉은 1980년대 값싼 외국산 제품이 들어오면서 국내 재배 농가가 사라졌다. [사진 flickr]

홉은 1980년대 값싼 외국산 제품이 들어오면서 국내 재배 농가가 사라졌다. [사진 flickr]

홉 역시 1934년 일본인에 의해 함경남도 개마고원 부근인 혜산 지방에서 재배되기 시작했다. 현재도 북한의 맥주는 현지에서 재배한 홉을 활용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한에서는 1960년대부터 재배가 시작됐다. 1970년대부터는 강원도와 충북, 경북 지역 등에서 홉 경작 농지가 넓어지면서 1980년대에는 국산 홉만으로도 맥주회사의 재료 수요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게 됐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농산물 수입 개방의 영향으로 독일·미국·체코 등에서 값싼 홉이 들어오면서 국산 홉은 자취를 감췄다.

국내 맥주 시장 규모는 연간 4조원이 넘는다. 맥주 제조용 맥아는 매년 23만 톤 가량 수입된다. 맥주 재료를 국산화한다면 농업의 부가가치를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맥주 대기업에 공급함으로써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할 수 있고, 현재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수제맥주 양조장의 새로운 공급처가 될 것이다. 과거에는 맥주 회사가 농협을 통해 계약을 한 후 지역별로 생산되는 맥주 보리를 전량 수매하기도 했다.

홉을 가공해서 운반과 사용이 편리하도록 만든 펠릿. [사진 황지혜]

홉을 가공해서 운반과 사용이 편리하도록 만든 펠릿. [사진 황지혜]

홉의 경우 국내에서 재배·가공하면 농업과 국산 맥주의 경쟁력을 함께 향상시킬 수 있게 된다. 홉의 아로마는 산소·열 등에 의해 쉽게 파괴되기 때문에 산지에서 가까운 곳에서 맥주를 만들면 맥주의 맛을 크게 살릴 수 있다. 세계 최대 홉 생산지 중 하나인 미국 워싱턴주 야키마 밸리 주변으로 수제맥주 산업이 번창한 이유다. 또 홉을 개량해 개성 있는 맥주를 만들 수도 있다. 더 나아가 해외와 경쟁할 수 있는 수준까지 가격을 낮추고 품질을 끌어올린다면 수출까지도 도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수제맥주 양조장이 늘어나면서 인기 홉은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구하기도 어렵다.

국내에서도 작은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농촌진흥청은 지금까지 맥주 보리 품종 20종 이상을 개발했다. 제주와 전남, 경남을 중심으로 계약 재배를 통해 연간 약 2만 톤을 생산한다. 제주도의 맥주 브랜드 제스피는 제주에서 재배한 보리를 활용해 맥주를 만든다. 보리의 싹을 틔우고 말려서 맥주 재료로 만드는 맥아 설비도 갖추고 있다. 전북 군산시도 맥아 제조시설을 갖추고 해당 지역에서 생산된 보리를 가공하고 있다.

홉 역시 경기 남양주, 충북 제천, 강원 속초 등지에서 수제맥주 양조장과 농장 주도로 재배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수입 재료와 경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재배 면적, 가공 기술 등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독일을 비롯해 미국, 영국, 체코, 벨기에 등 맥주 강국에는 전 세계로 제품을 수출하는 맥주 재료 기업이 즐비하다.

맥주 원료의 국산화로 향하는 여정은 이제 첫걸음이다. 현실적인 장벽이 높지만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또 독창적인 우리만의 맥주를 만들기 위해서 꼭 가야할 길이다. 맥주 보리와 홉의 재배와 가공에 적극적이고도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맥주 보리를 가공한 엿기름은 각종 음료와 장류 개발에도 사용된다. 홉과 효모 역시 건강식품, 화장품 등에 널리 쓰일 수 있다.

또 국내 맥주 기업들이 국산 재료를 사용하도록 하는 정책적 유인도 필요하다. 전통주처럼 국산 재료를 사용하면 세금을 줄여주거나 배달을 허용해주는 등의 방안을 검토해볼 만하다.

비플랫 대표·비어포스트 객원에디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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