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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문화난장

‘세한도’의 후예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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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이 그림은 분명 좌우명이다(尸幅分明座右箴).’ 중국 청나라 문인 오순소가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걸작 ‘세한도’(歲寒圖·국보 제80호)를 보고 남긴 감상평이다. 오순소는 ‘세한도’를 삶의 모토로 삼겠다고 했다. 엄청난 자극을 받은 모양이다. 왜 그랬을까. 그는 옛사람의 고상한 지조를 느꼈다고 고백했다. ‘눈과 서리 겪을수록 더욱 푸르거니, 이와 같은 절의를 누가 가질 수 있을까’라고 되물었다.

사계절 푸른 추사의 걸작 #돌고 돌아 국민의 품으로 #19세기 한·중 교류 결정판 #그 기품을 누가 이어갈까

또 다른 중국 문인 오찬은 어떤가. 그도 ‘세한도’에 흠뻑 빠진 것 같다. ‘혹독한 서리와 눈을 만나도, 하늘과 땅의 바른 정기로 우뚝하다. 변하지 않는 절의를 배우고 익혀, 현인을 본받고 성인을 본받는다’라고 썼다. 추사의 그림 한 폭은 중국 학자들에게 이토록 큰 영향을 미쳤다. 장요손의 촌평도 절창이다. ‘중국과 조선에 새로운 우정 맺어지고, 백 리 먼 발걸음에 현자들이 모였네.(중략) 한 폭의 그림에 영원의 뜻 담겨, 시들지 않는 절의가 온 누리에 빛나네.’

‘세한도’는 두 말이 필요 없는 추사의 명작이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로 꼽힌다. 소장자 손창근(91)씨가 지난주 국립중앙박물관에 아무 조건 없이 기증했다. 코로나19로 우울한 우리 사회에 즐거운 소식을 안겼다. 개성 출신의 사업가인 선친 손세기(1903~83)씨에 이은 2대째 문화재 기증으로 화제가 됐다. 지도층의 사회적 책임을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이 됐다.

추사 김정희의 자화상으로 불리는 ‘세한도’(부분). 19세기 한국 문인화의 대표작이다. 시·서·화에 능통한 추사는 당대 중국 학자들에게도 큰 존경을 받았다. [중앙포토]

추사 김정희의 자화상으로 불리는 ‘세한도’(부분). 19세기 한국 문인화의 대표작이다. 시·서·화에 능통한 추사는 당대 중국 학자들에게도 큰 존경을 받았다. [중앙포토]

‘세한도’는 단출한 그림이다. 제주 바닷가에 유배 중인 추사가 제자 이상적(1803~65)에게 그려주었다. 가로 69.2㎝, 세로 23㎝ 작은 화폭에 소박한 집 한 채와 소나무·잣나무 네 그루를 쓱쓱 그려 내려갔다. 중국에서 구한 귀중한 책을 바다 멀리 스승에게 보내준 제자의 깊은 정에 감사하는 마음에서다. 알려진 대로 ‘세한도’는 『논어』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다. 시류에 굴하지 않는 스승과 제자의 도타운 우정이다. 굳게 절개를 지킨다는 뜻의 ‘후조(後凋)’도 사대부들이 따라야 할 목표가 됐다.

추사 만년의 농익은 붓놀림이 담긴 그림도 그림이지만 ‘세한도’의 또 다른 진가는 그림 뒤에 붙은 중국과 조선 학인들의 시문(詩文)이다. 이상적은 중국 연경(燕京·현재 베이징)에 가는 길에 스승의 그림을 중국 학자들에게 보여주었고, 이에 중국 문인 16명이 앞다투어 추사와 제자의 ‘후조’를 예찬하는 글을 지었다. 200년 전 국경을 뛰어넘는 양국 문인들의 학문 공동체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덕분에 ‘세한도’는 길이 15m의 두루마리 대작으로 완성됐다.

추사의 그림을 모티브로 삼은 조각가 김종영(1915~82)의 ‘세한도’.

추사의 그림을 모티브로 삼은 조각가 김종영(1915~82)의 ‘세한도’.

‘세한도’는 스토리텔링의 보고다. 19세기 한·중 문화교류가 1막이라면 2막은 20세기 한국 학자들의 응답이다. ‘세한도’는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이상적에 이어 그의 제자 김병선, 김병선의 아들 김준학, 일본학자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 등이다. 서예가 손재형은 1944년 오랜 설득 끝에 후지쓰카로부터 작품을 넘겨받고, 1949년 국어학자 정인보, 독립운동가 이시영·오세창에게 보여줬는데 이들 셋 또한 ‘세한도’ 말미에 역사에 남을 헌사를 적었다. ‘이 그림을 보며 수십 년 동안 고심에 찬 삶을 산 선열들이 떠올라 삼가 옷소매로 눈물을 닦는다’(이시영), ‘그림 한 폭 돌아옴이 조국강산 되찾을 조짐임을 누가 알았겠는가’(정인보) 등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세한도’는 미완성이다. 현재진행형이다. 정인보의 글 뒤에 빈 공간이 꽤 많이 남아 있다. 추사와 이상적은 지금 그 여백을 채울 21세기의 후예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3막의 불씨는 일단 손세기·손창근 부자가 지폈다. 거상(巨商) 손세기는 손재형을 거쳐 또 다른 개성 상인에게 넘어간 ‘세한도’를 1960년 4·19 무렵 사들였고, 그 아들 손창근이 60년 만에 국민의 품 안으로 돌려보냈다. 파란만장한, 이른바 팔자가 드센 ‘세한도’가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됐다.

살아생전 손세기에 관한 일화가 있다. ‘세한도’의 신기한 기운에 반해 “그림만 봐도 잠이 잘 오고 화가 풀렸다”고 한다. 자잘한 명리를 초월한 예술의 놀라운 치유력이다. 하루하루가 혼탁하고, 인심이 수시로 변하는 시대이지만 ‘세한도’에 담긴 후조는 결코 시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푸른 세상을 만들어가는 건 우리에게 남은 몫이겠지만….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