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나이 들어 성공이란 누워 책 한 권 보는 여유

중앙일보

입력 2020.08.26 07:00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55)

모셔 놓은 책은 책꽂이에 꼽힌 채로 마냥 있다는 게 문제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보여 주는 전시용 책이 되기도 한다. [사진 pexels]

모셔 놓은 책은 책꽂이에 꼽힌 채로 마냥 있다는 게 문제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보여 주는 전시용 책이 되기도 한다. [사진 pexels]

딸아이네 아파트 쓰레기장 옆에 누군가가 이사하며 버린 책이 무더기로 쌓여 있다. 『총 균 쇠』. 언젠가 인기리에 방송된 드라마에 나온 두꺼운 책이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도 있다. 고액지폐를 발견한 듯 눈치 보며 이것저것 찾아 다시 한쪽에 모았다. 내 수준에는 몇 번을 읽어봐야 해석이 가능할 묵직한 책들이다. 겉면도 중후하고 두꺼워서 갖고만 있어도 유식해 보이겠다. 이렇게 모셔 놓은 책은 책꽂이에 꼽힌 채로 마냥 있다는 게 문제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보여 주는 전시용 책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집에 들고 와 책장에 꽂아놓고 흐뭇하게 바라본다. 오래전 부잣집에서 본 멋진 책장 같다. 주운 거로 사치를 부려도 마냥 기분이 좋다.

서울 살 적 부동산업을 하는 지인을 따라 엄청 큰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운동장같이 넓은 거실 한쪽을 가득 채운 책이 눈에 확 들어왔다. 책장 가득 꽂힌 화려하고 품격까지 갖춘 듯한 책이었다. 거기에 책은 제목도 영어와는 또 다른 외국어로 돼 있어 기가 더 죽었다. 내 무식한 지성으로는 책을 펼쳐 줘도 모르리라 생각하면서도 속 내용은 어떤 것이 쓰여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그때 집주인 여자가 차를 받쳐 들고 나왔다. 좋은 책이 많이 있으니 너무 부럽다고 하니 차를 따르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요? 이 책은 남편 책인데요. 그냥 책꽂이 용 아닐까요? 우리는 저 책을 펼쳐보지 않아서 내용은 아무도 모른답니다. 호호호.” 가벼운 농담으로 응대해주는 솔직한 그녀가 마음에 와 닿아 부잣집에 대한 선입견이 사라졌다. ‘그냥 집을 장식할 인테리어로 책을 사용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무게 있는 책 모양에 걸맞게 해석과 의미가 없어도 되는 고난도 글을 써야 하는 작가도 있을 거라 생각하며 다녀온 그때가 기억난다.

서점 사장은 책을 사러 온 손님에게 말한다. 이 책은 읽지 않는 책이랍니다. 우리 상품은 품위 있고 돈 많은 신사만 살 수 있는 고급 브랜드랍니다.[사진 pexels]

서점 사장은 책을 사러 온 손님에게 말한다. 이 책은 읽지 않는 책이랍니다. 우리 상품은 품위 있고 돈 많은 신사만 살 수 있는 고급 브랜드랍니다.[사진 pexels]

어느 유머집에서 본 재밌는 책 이야기다. 화려하고 멋진 백화점 같은 서점이 있다. 그 서점은 돈만 많은 상류층을 위한 공간이다. 거기에 꽂힌 책들은 상류사회의 책꽂이 용이라 일반인에겐 안 판다. 비싸서도 못 산다. 서점 사장은 책을 사러 온 손님에게 말한다.

“이 책은 읽지 않는 책이랍니다. 우리 상품은 품위 있고 돈 많은 신사만 살 수 있는 고급 브랜드랍니다. 이곳은 최고의 고급 손님만 방문할 수 있는 서점입니다. 선생님은 책을 보는 눈이 높으십니다. 집을 방문한 손님이 이 책을 보는 순간 선생님은 최고의 인상으로 남을 것입니다.”

온갖 아부로 립서비스한 책방 사장은 중후하고 품격 있는 손님에게 다시 묻는다. “선생님 그래도 가격에 따라 내용도 여러 가지랍니다. 선생님은 가벼운 것을 원하십니까? 무거운 것을 원하십니까? “품위 있는 손님이 대답한다. “으흠. 무거운 것도 상관없어요. 자동차를 가지고 왔거든요.”

모아도 모아도 성에 차지 않는 넘치는 재산을 가진 부자도 언젠가는 한권의 책을 여유롭게 읽기 위해 부지런히 사 모은 값진 재산이 아닐까. 또한 나는 마음의 양식 하나 제대로 쌓지 않고 남의 눈을 인식하며 보여주기 위한 책장만 가진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도 한다.

이번에 책을 통해 나는 이미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주웠든 얻었든, 두껍고 어려운 그 책을 며칠 동안 설렁설렁 넘기며 다 읽었으니 말이다. 지나고 보니 나이 들어 성공이란 느긋하게 누워 책 한권 볼 수 있는 여유인 것 같다. 인문학을 사랑하는 더 멋진 인생을 위해 가볍게 읽기 좋은 책 몇 권을 샀다. 그중 한 권은 이번에 서울서 잔치를 치른 지인에게 보낸다. 코로나로 참석하지 못한 섭섭한 내 마음마저 갈피에 얹어 곱게 포장해 택배 보내는 여유를 부려본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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