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박정호 논설위원이 간다

“나는 오늘도 새로운 길을 간다” 82년 전의 다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모교 연세대로 돌아본 윤동주

시인 윤동주는 그토록 고대한 대한민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45년 2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윤동주기념관으로 다시 태어난 연세대 핀슨관과 1968년 세운 윤동주 시비. 최정동 기자

시인 윤동주는 그토록 고대한 대한민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45년 2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윤동주기념관으로 다시 태어난 연세대 핀슨관과 1968년 세운 윤동주 시비. 최정동 기자

하루 한 장씩 넘기는 달력은 1938년 7월 25일에 고정돼 있다. 침대에는 읽던 책을 싸려는 보자기가 놓여 있다. 82년 전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 학생 한 명이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 북간도 룽징(龍井)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침대 옆 선반에 놓인 기차표도 보인다. 경성에서 룽징으로 가는 열차표다. 청년은 숱한 검문과 검색을 받으며 국경을 넘어갔을 것이다.

옛 기숙사 건물 전체 기념관으로 #한국어 익히며 시인의 꿈 이룬 곳 #친필 원고 등 국내외 자료 총망라 #일제강점기 청춘들 흔적 살려내

여기서 청년은 윤동주(1917~45) 시인이다. 1938년 봄 연희전문에 입학한 그가 첫 방학을 맞은 심정은 어땠을까. 책꽂이에 있는 『우리말본』이 들어온다.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이 한국어 문법을 집대성해 1937년 펴낸 책이다. 윤동주는 최 교수로부터 제대로 된 한국어를 공부했다. 아름다운 우리말에 눈을 떴고, 시어를 다듬고 다듬었다. 일제의 조선어 폐지 정책에 따라 최 교수에게 한 학기밖에 배우지 못했지만 말이다.

책상 위에 ‘비오는 밤’ 습작 노트가 놓여 있다. ‘솨― 철석! 파도소리 문살에 부서져/잠 살포시 꿈이 흐터진다.’ 윤동주와 친구들이 탐독한 책도 보인다. 화가 고흐 전집, 퀴리 부인 전기 등이다. 관심사가 다양했던 모양이다. 1937년 할리우드 모험영화 ‘솔로몬왕의 보물’(King Solomon’s Mines) 포스터도 흥미롭다. 당시 학생들의 졸업 앨범에 실린 사진이다.

100년 시간 담은 근대문화재로 등록

대학생 윤동주가 머문 기숙사 방을 재연한 모습. 최정동 기자

대학생 윤동주가 머문 기숙사 방을 재연한 모습. 최정동 기자

이 풍경은 윤동주가 머문 대학 기숙사 방을 재연한 것이다. 일제의 폭정이 극에 달한 시절, 자유와 이상을 꿈꾼 80년 전 청춘들의 초상화쯤 된다. 청년 윤동주는 이곳 격자무늬 창을 통해 하늘과 바람과 별을 바라보며 나라 잃은 아픔을 노래하고, 해방된 조국에 대한 염원을 키워갔다.

옛 연희전문 기숙사 건물 전체가 윤동주기념관(이하 기념관)으로 새로 태어났다. 1922년 건립된 핀슨관이다. 100년 전 건축비를 지원한 미국 남감리교회 핀슨 박사에서 이름을 따왔다. 그간 음대, 대학신문, 법인사무처 건물로 사용하다가 2년 전부터 기념관 개관을 본격 준비해왔다. 2013년 윤동주 유족들이 시인의 육필 원고 및 유물 전체를 대학 측에 기증하며 기념관 조성이 구체화했고, 연대 75학번 동문 박은관 시몬느 회장의 후원으로 열매를 맺게 됐다.

기념관은 총 3층, 연면적 740㎡(약 224평) 규모다. 1층 전시장, 2층 도서관, 3층 공연장으로 꾸며졌다. 윤동주 개인을 넘어 그와 교류한 친구, 그를 연구한 국내외 문인·학자 등을 연결하며 윤동주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해온 면모를 다각적으로 살폈다. 김성연 기념관 총괄기획실장은 “단순한 복원, 재현이 아닌 끝없는 해석의 공간으로 구성했다. 이곳을 거쳐 간 사람들의 흔적을 주목해달라”고 말했다. 설계는 연세대 건축과 성주은·염상훈 교수가 맡았다. 성 교수는 “옛 모습을 최대한 간직하되 그간 칠하고 또 덧칠해온 건물 내부 페인트를 얼룩덜룩하게 갈아내 100년 세월의 층위를 드러냈다”고 설명했다.

윤동주가 태어난 중국 룽징의 바람과 교회종, 벌레 소리 등을 재연한 미디어아트실.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이현진 교수의 작품이다. 최정동 기자

윤동주가 태어난 중국 룽징의 바람과 교회종, 벌레 소리 등을 재연한 미디어아트실.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이현진 교수의 작품이다. 최정동 기자

이곳에는 여느 기념관에서 볼 수 있는 대형 사진이나 흉상 같은 장식물이 없다. 윤동주란 문학, 문화 콘텐트에 집중했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1층 전시장이다. 옛 기숙사의 작은 방마다 윤동주가 남긴 시와 산문의 제목을 붙였다. 시인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시공간을 압축했다. 어느 방 하나 허투루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자료가 알차다. 윤동주 유족이 기증한 친필 원고와 기숙사 건물이 각각 2018년과 2019년에 등록문화재 712호, 770호에 오른 것도 특기사항이다. 윤동주 사후 75년 만의 모교 귀환이라 부를 만하다.

일례로 네 번째 방 ‘새로운 길’을 보자. 38학번 새내기 윤동주가 조선의 말과 역사를 익히고, 당대 세계 문화를 흡수하는 과정을 돌아본다. ‘새로운 길’은 주로 동시를 써온 윤동주가 대학에 들어와 처음으로 쓴 시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고개를 넘어서 마을로/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나의 길 새로운 길.’ 앞날에 대한 풋풋한 기대다. 반면 그가 4학년 때 쓴 ‘길’은 ‘잃어버렸습니다’로 시작한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라고 끝냈다. 사방이 꽉 막힌 현실에 대한 처절한 깨달음이다. 숱한 고통 끝에 얻은 그의 각성은 이후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서시’)에서 한층 굳건해진다.

윤동주는 27년 2개월이란 짧은 생을 살았다. 그중 연희전문 4년이 가장 뜨거웠다. 시인 윤동주의 피가 돌고 뼈가 여물었다. 시 19편을 모은 대학 졸업기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했으나 험악한 정세를 염려한 주변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시집 3부를 작성했는데, 그중 후배 정병욱에게 준 한 부가 살아 남아 오늘날 우리가 그의 문학을 누릴 수 있게 됐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래 제목은  『병원』이었다고 한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늙은 의사는)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병원’) 병든 사회를 치유하겠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코로나19 재난으로 연말께 문 열어

윤동주

윤동주

지난 21일 찾아간 연세대 교정은 고요하기만 했다. 물론 코로나19 때문이다. 우리에게 너무 친숙해 되레 새롭지 않을 것 같은 윤동주가 지금 여기에 있다면 어떤 말을 건넬까. 기념관 책임자인 김현철 문과대학장은 “도서관에 갇힌 윤동주가 아니라 항상 살아 있는 윤동주를 봐야 한다. 늘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남에 대한 배려를 읊은 윤동주의 시는 코로나19로 옥죄인 우리네 마음을 넓혀준다”고 했다. 김성연 실장은 윤동주의 산문 ‘종시’를 권했다. 대학 4학년 때 등하굣길 풍경을 옮긴 글로, 시인은 남대문 주변 서민과 철길 공사장 노동자를 보며 활력을 찾았다. “종점이 시점이 된다. 다시 시점이 종점이 된다”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준비해온 기념관도 코로나19로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윤동주 생일인 12월 30일에 맞춰 일반 개방할 예정이다. 윤동주가 일본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쉽게 쓰여진 시’의 마지막 대목을 옮겨본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조카인 유족 대표 윤인석 교수(성균관대 건축과)는 “큰아버지 성품에 기념관 건립을 계면쩍어 하실 것 같다”며 “윤동주란 박제화된 인물 대신 집을 떠난 전국 각 지역 청춘의 일상이 깃든 곳인 만큼 건물 이름도 연희문학(문화)관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기숙사 3층 천장 목재에 찍힌 ‘신의주’

연세대는 시인 윤동주가 재학시절 머물렀던 기숙사 건물 핀슨홀 전체를 전시, 강연 공간을 갖춘 윤동주기념관으로 단장하고 있다. 3층 천장에서 발견한 ‘신의주목’ 한자. 최정동 기자

연세대는 시인 윤동주가 재학시절 머물렀던 기숙사 건물 핀슨홀 전체를 전시, 강연 공간을 갖춘 윤동주기념관으로 단장하고 있다. 3층 천장에서 발견한 ‘신의주목’ 한자. 최정동 기자

윤동주기념관 3층은 텅 비어 있다. 100년 전 나무로 짠 박공 지붕이 노출돼 있다. 마치 책을 펼쳐서 엎어놓은 모양새다. 예전의 평평한 회벽 천장을 걷어내고 기숙사를 처음 지을 때의 모습을 간직하기로 했다. 천장 목재 한 곳에 ‘신의주목’(新義州木·사진) 작은 글자가 찍혀 있다. 압록강 하구에서 가져온 나무로 건물을 세운 것이다. 연세대 인근 안산에서 캐온 암갈색 운모편암으로 건물 외벽을 마감했으니 남과 북의 만남인 셈이다.

3층 동쪽 도머창(지붕 경사면 위로 튀어나온 창) 밖으로 1968년 세운 윤동주의 ‘서시’ 시비가 들어온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던’ 청년 시인의 간절한 마음을 돌이켜본다. 남쪽 창가엔 1인용 의자가 있다. 무릎을 꿇고 창밖을 내다볼 수 있다. 윤동주의 ‘참회록’ 한 구절이 떠오른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는 다짐이다.

3층 공간은 우리가 평소 잊고 사는 자신과 대면하는 곳이다. 공연장·강연장으로도 쓰일 예정이다. 김현철 윤동주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은 “커피숍을 들이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빈 공간으로 남겨두기로 했다”며 “사람과 사람이 만나며 새로운 길을 계속 만들어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