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허호의 꿈을 찍는 사진관(21)
개발도상국가의 빈민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보통 엄마가 아기를 애를 쓰며 키우는 모습을 봅니다. 아빠는 도망거가나 감옥에 있곤 했지요. 그런데 컴패션 직원에게 들은 바로는 후원자도 여성이 많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를 둔 엄마가 특별히 많다지요. 그래서 주도적으로 후원하는 아버지가 독특하다면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18년, 그런 한국의 아버지 후원자 몇몇과 필리핀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수의사, 육아 웹툰 에세이 작가, 교육 컨설턴트, PD 등 각기 다른 이력의 아빠가 모였죠. 이들이 필리핀 아빠를 만났습니다. 마침 해가 저물고 있었고 어두컴컴한 빈민가를 지나느라 차는 길을 헤맸습니다. 그러고 만난 필리핀 아빠는 한때 술과 마약, 도박에 빠져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소개를 듣고 참가자들은 조금 긴장한 듯 보였습니다. 저야 한두 번 본 게 아니지만요.
필리핀 아빠는 한마디로 자녀 덕에 개과천선했습니다. 컴패션에서는 아이가 학교에 다니고 영양실조에서 벗어나고 선생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지만 직접적으로 자신이 혜택 받은 건 없지요. 그런데도 마음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트라이시클(자전거 삼륜 택시) 운전사로 하루 3000~4000원을 벌며 택시 임대료를 떼고 남은 돈으로 간신히 살아가는 이들. 자신을 찾아온 한국 후원자 앞에서 고단한 삶과 책임감, 미안함, 자녀의 사랑스러움을 열띠게 이야기했고, 결국 한국 아빠나 필리핀 아빠나 별다를 게 없다는 것을 서로 확인했습니다.
사실 저는 한국 아빠가 필리핀 아빠를 만난다고 할 때부터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줄 알았습니다. 다 같은 사람이고, 다 같은 아빠니까요. 생각 이상의 가난과 환경을 보면서 자기를 대입시켰을 때 암담함부터 밀려오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다 보면 필리핀 아빠가 자신의 부족한 것에 대한 갈망이 클 것 같지요. 그런데 막상 대화를 해보니 자식한테 더 좋은 환경과 물질을 공급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같고, 삶을 보는 관점이나 행복관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날 이들은 아이를 통해 더 크게 선입견이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날 가정방문을 앞두고 심 작가는 아이에게 후원자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물어본다고 했습니다. 다른 가정에서는 아이가 너무 어려서 물어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후원하는 아이에게 답을 들은 것처럼 여겨질 것 같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후원자가 어떤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니?”하고 묻자, 소녀가 대답했습니다. “후원자가 처한 힘든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 주면 좋겠어요. 매일 기도해 줄 수 있으니까요.” 심 작가는 굉장히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잊지 못할 거예요’…. 참가자가 예상할 수 있는 가장 마음 따뜻하고 좋은 답은 이런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아이의 답은 예상을 뛰어넘었고, 참가자들은 잔잔한 감동에 할 말을 잊었습니다.
육아 관련 책을 세 권이나 낸 심 작가는 처음에는 이 여행의 관찰자인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꼬맹이와 땀 흘리며 농구를 하고, 그림을 그려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컴패션 여행 직후 ‘아이가 잘 자라는 것에는 엄청난 힘이 숨어 있습니다’라는 한 줄로 소회를 담아냈습니다. 아마도 아들을 키우면서 겪은 자신의 변화뿐 아니라, 여행 중에 만난 아이를 통해 변한 자신의 모습을 전한 것 같습니다.
사진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