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한끼

팔순 넘긴 실험미술 ‘청년’ 김구림, 술은 못해도 안주 킬러

중앙선데이

입력 2020.08.2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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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호 27면

예술가의 한끼

김구림은 80 중반이지만 여전히 할 일이 많은 실험미술의 청년작가다. [사진 김구림]

김구림은 80 중반이지만 여전히 할 일이 많은 실험미술의 청년작가다. [사진 김구림]

1980년대 후반,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늦은 밤. 김구림(1936~)의 스튜디오에 스무 명 남짓한 교민들이 초대됐다. 그들은 침묵을 지키는 조건으로 참석했다. 제향이 피어올랐다. 침묵을 뚫고 ‘유세차’로 시작하는 축문이 느릿하게 흘렀다.

상주서 태어나 대구서 청소년기
미대 팽개치고 곧장 작가 생활

시대 앞서간 전위예술·퍼포먼스
연극·음악·무용·패션까지 섭렵

도쿄·뉴욕·LA서도 자유로운 꿈
기름기 쏙 뺀 베이징덕 좋아해

제상에는 제주가 직접 알뜰하게 장만하고 요리한 제물들이 얹혔다. 홍동백서, 어동육서에 가지런히 떡이 포개진 질서정연한 제사상 차림이었다. 속껍질의 흔적을 살짝 남겨 가며 밤을 치고 말린 문어 다리에 주머니칼을 대어 문어조(文魚條)를 만들었다. 일일이 다듬은 나물들도 등장했다. 꼬치에 꿴 전에서 은근한 기름냄새가 났다. 제주 김구림이 하늘을 향해 소지(燒紙)를 날려 보내자 드디어 제사가 끝났다. 철상(撤床)을 한 후,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는 준(餕)의 시간이 왔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나물비빔밥, 생선과 술을 앞에 두고 정결한 흥분이 일었다.

69년 ‘1/24초의 의미’는 한국 첫 실험영화

김구림의 작품 ‘음양4-S.368’, 20x15x7cm, 혼합매체, 플렉스글라스, 2007년. [사진 김구림]

김구림의 작품 ‘음양4-S.368’, 20x15x7cm, 혼합매체, 플렉스글라스, 2007년. [사진 김구림]

구석에서 어떤 사내가 흐느껴 울고 있었다. 이민 온 지 꽤 오래된 데다 제사도 제삿밥도 다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그만 떠나온 고국과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불효의 마음이 사무쳤던 것. 실험적인 작가 김구림은 평생 숱한 퍼포먼스를 했다. 이날 밤의 제사는 어떤 사나이를 울려 버린 기막힌 퍼포먼스가 되고 말았다.

김구림의 외국 생활은 길었다. 그곳에서도 제사는 잊지 않았다. 뉴욕에 살 때는 퀸스의 한국인 가게에서 제물들을 사서 제사상을 차렸다. 여행 중에 기제사를 지내야 할 상황이면 호텔에서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냈다. 미국에서 살 때 그는 햄버거에 콜라를 좋아했다. 즉물성의 햄버거와 정신성의 제물, 전혀 엉뚱한 조합이다. 그의 삶 또한 시종 엉뚱했다.

김구림은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대구에서 보냈다. 대구에서 대대로 큰 한의원을 하던 집안이었다. 부친은 백화점과 영화관을 경영했다. 풍류를 아는 분이었다. 모친은 음식 솜씨가 좋았다. 상주에 대소사가 생기면 음식 차림의 책임을 맡았다.

김구림은 실험적인 미술가다. 그의 삶 자체가 실험적이었다. 미술대학 따위는 중간에 팽개치고 곧바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그 결과 모든 걸 독학으로 해결해내는 능력자가 됐고 또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가 됐다. 여러 장르에서 그의 이름 앞에 붙는 한국 최초란 수식어가 한둘이 아니다. 미술뿐 아니라 연극·영화·음악·무용·패션 등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대구에서 상경한 김구림은 섬유를 취급하는 유영산업의 기획실장으로 일했다. 란제리 등을 해외에 수출하려면 여성모델을 동원하여 홍보영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 제작을 직접 맡기로 했다. 이때의 경험을 살려 1969년 ‘문명, 여자, 돈’이라는 작품을 8mm 필름으로 제작했으나 미완성작으로 끝났다. 이어서 같은 해 국내 최초의 실험영화로 일컬어지는 ‘24분의 1초의 의미’를 16mm 필름으로 제작했다. 정찬승(1942~1994) 등이 출연했다. 이 실험영화는 2016년 런던 테이트모던 스타오디토리움 극장에서 재상영됐다.

1970년은 바빴다. 제1회 서울국제현대음악제에서 백남준의 작품 ‘피아노 위의 정사’를 연출했다. 정찬승과 화가 차명희가 과격한 퍼포먼스를 했다. 제4집단을 결성해 정찬승, 방거지, 손일광 등과 함께 명동거리에서 퍼포먼스를 했다. 곧바로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즉결처분에 회부됐다. 중랑천 하류, 한양대에서 살곶이다리 건너편의 둑을 불태우고 그 흔적을 보여 주는 ‘현상에서 흔적으로’라는 대지예술 작품을 발표했다. 당시 서울의 4월은 아직 추울 때였다. 마른 풀에 불이 잘 붙었다. 불탄 흔적에서 필경은 새싹이 나면서 조금씩 다른 형태와 빛깔로 변해 가는 작품이었다.

김구림을 위시한 이들의 미술행위는 신문의 문화면이 아닌 사회면에 더 자주 등장할 정도로 일반인들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충격적인 사건들이었다.

국내 최초의 실험영화로 일컬어지는 ‘24분의 1초의 의미’(1969)를 촬영 중인 김구림(왼쪽)과 정찬승. [사진 김구림]

국내 최초의 실험영화로 일컬어지는 ‘24분의 1초의 의미’(1969)를 촬영 중인 김구림(왼쪽)과 정찬승. [사진 김구림]

정찬승과는 형 동생으로 친했다. 김구림이 일하는 유영산업의 1층은 다방이었다. 정찬승 등은 김구림 이름으로 달아 놓고 태연히 공짜 커피를 마셨다. 둘은 회사에서 가까운 명동의 은성을 찾아가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은성은 탤런트 최불암의 모친이 경영하던 술집으로 숱한 예술가들의 베이스캠프였다. 유네스코 빌딩 뒷골목 다방 코지 코너도 자주 들렀다.

1973년 30대 후반이 된 김구림은 도쿄로 갔다. 세이부 신주쿠선의 아라이야쿠시마에(新井薬師前)역 근처에 터를 잡았다. 도쿄에 가자마자 긴자의 시로타갤러리에서 전시를 하며 일본 현대미술계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모노하(物派)의 중심작가인 스가 기시오(管木志雄 1944~)와 의기가 투합했다. 이 둘은 중층적인 사유의 겹들을 돌파하거나 비트는 참신한 발상을 느슨하면서도 촌철살인의 표현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꿈과 욕망의 청년 김구림이었다. 지적인 허기는 신주쿠의 기노쿠니야 서점에 가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것으로 메워 나갔다. 문제는 육체적인 허기였다. 스시를 좋아했지만, 화랑이 밀집한 긴자에서 스시를 먹기에는 경제가 빠듯했다. 어쩌다 도쿄의 변두리 아라이야쿠시마에역 근처의 허름한 식당에서 값싼 스시와 라멘을 먹는 날은 그나마 호사를 누리는 날이었다. 허기를 못 이겨 월세 주인집의 밥솥에서 식은 밥을 슬쩍 하곤 했는데 결국은 들켜 버렸다. 주인집 노파는 오히려 따뜻하게 웃어 주었다. 언제든 편하게 밥을 먹으라 했다. 감기에 걸리면 하루 두 번도 탕에서 목욕할 수 있게 배려했다. 세상은 도처인정이었다. 나중에 일본을 재방문했을 때 선물을 들고 옛집을 찾아갔다. 노파는 따끈한 밥을 가득 내어놓았다. 이번에는 그걸 다 먹지 못해 김구림은 미안해했다.

80년대 중반에 김구림은 거처를 미국으로 옮겼다. 처음에는 뉴욕에서 살다가 작업실 조건이 좋은 LA로 거처를 옮겼다. 경쟁을 싫어하는 김구림은 그래서인지 혼자 하는 운동을 좋아했다. 승마, 모터사이클 라이딩, 스포츠카 드라이브 등을 좋아했다. LA는 스피드광 김구림에게는 천혜의 땅이었다.

김구림은 육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야채를 생으로 먹거나 배추를 사다가 김치를 직접 담그기도 했다. LA에서 만난 그의 부인은 그에게서 김치 담그는 법을 배웠다. 뉴욕과 LA의 차이나타운은 자주 찾았다. 육식인데도 기름기가 쑥 빠진 베이징덕은 좋아했다.

LA선 승마·스포츠카 등 즐긴 스피드광

김구림은 술을 못했다. 역시 술을 못하는 조각가 조성묵(1940~2016)이 그의 단짝이었다. 토탈미술관의 설립자인 건축가 문신규(1938~)가 가세해 이들 셋은 평창동에서 이웃사촌으로 자주 모였다. 어느 날 멀리서 들리는 단소 소리를 듣고 이들은 충동적으로 단소를 배우기로 했다. 이상하게도 유독 김구림만이 예전부터 단소를 불던 사람처럼 단소가 입에 척척 붙었다. 사실 김구림은 육군 군악대 출신이다. 논산훈련소 군악대에서 호른을 맡았다. 호른은 음을 잡기가 힘든 악기다. 군악대의 고참들이 꺼리는 악기다. 신병 김구림은 생전 처음 불어 보는 호른의 음을 용케도 잘 잡아냈다. 그에게는 악기나 기계를 잘 다루는 재능이 있었다. 기계에 많이 의존하는 미술 장르인 판화에도 선구적이었다. 1981년 서울 신영동에 구림판화공방을 개설했다.

미술인들의 술자리에서 김구림은 안주 킬러로 유명하다. 예전에는 안주가 술보다 상대적으로 비쌌다. 경제가 빠듯한 미술인들의 술자리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안주를 아껴 먹는 불문율이 있었다. 눈치 없이 이를 깨는 건 김구림이었다. 누군가가 “구림아, 안주 좀 그만 먹어라!” 하며 큰소리로 외치면 인사동 술집에서 한바탕 큰 웃음이 터진다. 격의 없이 다정한 농을 주고받던 친구들은 하나둘 세상을 떴다.

팔십 중반이지만 그는 여전히 할 일이 많은 실험미술의 청년작가다. 세계미술계가 주목하는 한국의 아방가르드 작가, 청년 김구림이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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