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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간부 공개 반성문…김정은, 위임 아닌 ‘책임 분산’ 통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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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호 05면

북한 ‘경제 실패’ 인정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9일 평양 노동당 중앙위 본부 청사에서 제7기 제6차 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9일 평양 노동당 중앙위 본부 청사에서 제7기 제6차 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경제 실패’를 인정하자 고위 간부들이 줄줄이 ‘공개 반성문’을 썼다.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 21일자 1면에 경제 실패가 자신들의 책임이라고 자인하는 기고문을 올리면서다.

“원수님 진창길 걸으시게 했으니…” #노동신문 1면에 잇따라 게재 #“김정은 자신은 좋은 역할 맡고 #궂은 역할은 아래 사람에게 넘겨” #김여정에게 일정 권한 넘긴 것도 #횡적 아닌 상하 역할 분담 분석

장관급에 해당하는 장길룡 내각 화학공업상은 기고문에서 “당이 제시한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 목표 수행에서 경제 발전의 두 기둥을 이루는 화학공업 부문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한 원인은 우리 성 일꾼들이 전략적 안목과 계획성 없이 사업한 데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3대 제철소 중 하나인 김책제철연합기업소의 김광남 지배인도 “최근 몇 년간 나라 경제 전반이 제대로 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금속공업의 맏아들인 우리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고백했다.

박창호 황해북도당위원회 위원장은 “경애하는 최고 영도자 동지의 고귀한 말씀을 받아 안으며 마음속 가책을 금할 수 없었다”며 “도를 책임진 일꾼으로서 우리 원수님께서 홍수로 고생하는 인민들에 대한 걱정으로 그처럼 험한 진창길을 걸으시게 했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자책했다. 황해북도는 최근 집중 호우로 막대한 피해를 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고위 간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자아비판에 나선 것은 김 위원장이 주재한 지난 19일 당 전원회의에서 경제 정책 실패를 공식 인정한 데 따른 것이다. 김 위원장은 이날 제7기 제6차 전원회의에서 “계획됐던 국가 경제 목표들의 심히 미진한 결함들을 전면적으로, 입체적으로, 해부학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고위 간부들이 잇따라 책임을 나눠 지는 모양새다.

북한 내부의 이 같은 움직임과 국정원이 거론한 이른바 ‘위임 통치’를 연관 짓는 해석도 나온다. 대북제재와 경제난 속에서 김 위원장이 보이는 행보가 권한 위임보다 책임을 분산시킨 성격이 강하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정원은 지난 20일 국회 정보위 업무보고에서 김 위원장이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과 박봉주 노동당 부위원장 등 측근들에게 부분적으로 권한을 이양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결국 김 위원장이 좋은 역할은 자신이 맡고 궂은 역할은 밑의 사람에게 맡게 하겠다는 것”이라며 “경제 문제와 코로나19, 수해 등 내부 문제와 관련해 내각과 김여정 부부장의 책임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담겨 있다”고 진단했다.

김 위원장의 위임 통치에 대해 미국 내 한국 전문가들도 “실무 기능을 집행할 수 있는 재량을 둔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국정원 보고 이후 일각에서 김 위원장의 건강 이상설이 도는 데 대해서도 “김 위원장이 북한 내 절대 권력자라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스콧 스나이더 미 외교협회 한미정책국장은 지난 20일(현지시간) 미국의 소리(VOA)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김 위원장이 측근들에게 권력을 나눠준 것이 아니라 책임만 위임한 것”이라며 “측근들에게 책임을 나눠준 것은 북한이 현재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스나이더 국장은 “김 위원장이 모든 책임을 다 지고 있으면 상황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 혼자 감수하게 될 위험이 너무 크다”며 “그런 만큼 실무 재량을 나눠주는 것은 김 위원장이 각종 현안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겠다는 신호”라고 진단했다. 그는 그러면서 “김 위원장의 통치 활동은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아버지인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 때에 비해 조직 투명성도 강화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제니 타운 스팀슨 센터 연구원도 “김 위원장이 측근들에게 권한을 나눠주며 실패할 경우의 책임을 지우는 것은 이미 상당 기간 보여준 그만의 통치 스타일”이라며 “그 과정에서 이미 여러 고위 당국자들이 교체됐다”고 꼬집었다. 그는 “김정은 시대에 여러 다른 인물들이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는 양상을 보였지만 각자 감수해야 하는 대가는 컸다”며 이용호 전 외무상 경질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김여정 부부장 역시 남북관계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가 실제로 얼마나 결정권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21일 평화통일포럼에서 기자들과 만나 "행정용어를 빌리자면 측근들의 전결권을 조금 키워준 것”이라며 "하지만 측근들이 전결을 해도 결국 김 위원장에게 보고해야 하고 김 위원장이 종종 이를 뒤집기도 한다”며 "결국 ‘횡적 역할 분담’이 아닌 ‘상하의 역할 분담’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같은 역할 분담 방식에 나온 데 대해서는 권력 장악에 대한 김 위원장의 자신감과 함께 만기친람에 따른 피로를 동시에 꼽았다. 정 수석부의장은 "측근들에게 일을 시켜 보니 잘 해내고 효과도 내니 일을 시키는 것 아니겠느냐”며 "그 과정에서 아버지처럼 만기친람을 하려다 보니 몸도 좀 불편했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김다영 기자 kim.d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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