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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김정은 위임통치’설 와중에 방한하는 양제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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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중국 외교정책을 총괄하는 양제츠 중국 공산당 외교담당 정치국원이 22일 부산에서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회담한다. 시점이 미묘하다. 미·중 갈등이 날로 격화하는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공들여 온 남북관계가 얼어붙고, 문 대통령의 지지율도 떨어진 상황이다. 게다가 북한에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동생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에게 국정 전반에 걸쳐 위임통치를 시키고 있다고 국가정보원이 21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보고했다. 김정은이 과거보다 권한을 조금씩 동생에게 이양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여정에게 권한 이양’ 공개 직후 부산 찾아 # 북한사태, 미·중 갈등 속 ‘중국편’ 요구할 듯 # 동맹 기반 위 모든 가능성 열고 대비해야

국정원은 김정은의 건강 이상설은 부인했고, 김여정이 후계자로 정해진 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수령 1인 절대권력 체제인 북한 특성상 ‘위임통치 중’이란 말이 나온 것부터가 전례 없는 ‘이변’에 해당한다. ‘무오류의 화신’으로 떠받들어지는 북한 일인자가 ‘스트레스 경감 차원’에서 권력을 이양했다는 것도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속단은 금물이지만 정부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북한 상황을 주시하면서 대응 플랜 마련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당연히 미국과의 공조다. 이와 함께 양제츠의 방한도 ‘김정은 변수’를 염두에 둔 행보일 수 있는 만큼 정부는 중국과도 긴밀히 협의해 입체적 공조체제 구축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양제츠의 방한은 미·중 갈등이 핵심 의제일 것이란 점에서도 주목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얼어붙은 남북관계와 지지율 하락 등의 악재를 뒤집을 ‘한 방’으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에 공을 들여 왔다. 시 주석은 2014년 이후 6년 넘게 방한하지 않았고, 2017년 12월 문 대통령의 방중에 대한 답방도 차일피일 미루면서 문 정부를 애태워 왔다. 미국의 전방위 압박에 맞서 악전고투 중인 중국으로선 지금이 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기회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미국은 한국에 중국을 배제한 ‘경제협력네트워크(EPN)’ 동참을 압박하고 중국을 겨냥한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양제츠가 부산에서 서 실장을 만나면 시 주석의 연내 방한 의지를 강조하며 그 대가로 한국이 미국의 반중 전선에서 이탈해 중국 편들기를 요구할 공산이 크다.

정부의 냉정한 대응이 절실하다. 중국은 북핵과 남북관계, 무역에서 중요한 파트너다. 하지만 미·중이 전쟁 수준의 각축전에 돌입한 상황에선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는 등거리 외교는 미국을 동맹으로 둔 중견 국가(Middle power) 한국으로선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다. 한·미 동맹에 굳건한 기초를 둔 가운데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핵심 이익을 당당히 표명해 중국의 동의를 끌어내는 원칙의 외교, 가치의 외교가 우선이다.

미·중 갈등은 오는 11월 미 대선까지 더욱 격화할 것이고, 대선 결과 정권이 바뀌어도 이어질 공산이 크다. 강대국 사이에 끼인 한국은 다른 방도가 없다. 미·중으로부터 선택을 강요당하기 전에 우리의 원칙과 가치를 분명히 하면서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 양제츠의 방한은 그 전략적 외교의 시발점이 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