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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중고차 사기조직 첫 범죄집단 인정…n번방도 적용될 듯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과 공범들. [뉴스1]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과 공범들. [뉴스1]

대법원이 중고차 사기 조직을 ‘범죄집단’으로 인정하는 첫 판결을 내렸다. 기존 범죄집단에 대한 해석을 넓힌 판결로, ‘박사방’ 일당에게도 해당 법리가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표-팀장-팀원으로 이뤄진 중고차 사기 조직

A씨는 중고차량을 불법으로 판매해 피해자들의 돈을 가로챌 목적으로 인천에 일명 ‘외부사무실’을 세우고 함께 할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피해자 유인 역할을 맡은 전화상담원은 인터넷에 “2014년식 1만1800㎞ 운행한 스타렉스 캠핑카를 1296만원에 판매한다”는 거짓 광고를 올린다. 피해자가 중고차 매매단지로 오기로 약속하면 팀장에게 보고가 들어간다. 피해자를 맡는 건 딜러의 역할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광고와 유사한 차량을 보여주며 “사실은 저건 보험이 안 되는 차량”이라고 거짓말을 한 뒤 조건이 훨씬 좋지 않은 2008년식 주행거리 19만9600㎞ 그랜드스타렉스 차량을 시세보다 비싸게 팔아넘긴다. A씨를 비롯한 22명은 2016년 6월부터 1년 동안 70여 차례에 걸쳐 유사한 범행을 저질렀다.

범죄단체로 기소했지만 1심 ‘무죄’

검찰은 이들을 범죄단체로 봤다. 형법 114조에서 정한 ‘범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란 특정 다수인이 ▶일정한 범죄를 수행한다는 공동목적을 갖고 ▶계속적인 결합체이며 그 단체를 주도하거나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통솔체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1심 재판부는 이들을 범죄단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운 점에서 계속적인 결합체라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회사 조직과 같이 직책이나 역할이 분담되어 있기는 하지만 친분관계를 바탕으로 팀이 결정되었기에 복종체계를 갖추지도 않았다고 설명했다. 1심 재판부는 사기 등의 혐의만 인정해 대표 A씨를 징역 1년 4월에, 다른 공범들을 징역 1년~벌금 300만원 등에 처했다.

범죄단체→범죄집단으로 기준 낮췄지만 2심 무죄

항소심에서 검찰은 ‘범죄단체’가 아니더라도 ‘범죄집단’에는 해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범죄집단은 범죄단체에는 이르지 못한 조직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2013년 법이 개정되며 추가된 개념이다. 2심 재판부는 범죄집단은 다수의 결합이 계속적일 필요는 없고 동시에 동일 장소에 집합된 정도면 족하다고 규정했다. 또 범죄단체와 달리 대표와 공범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의 조직을 구성하는 일정한 체계를 갖추고 있으면 적용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도 2심 재판부는 외부사무소 일당이 범죄집단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놨다. 전화상담원 역할을 하는 직원이 면접을 볼 때 대표인 A씨가 아니라 팀 딜러만 만난 후 바로 일을 시작한 것을 보면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체계적 조직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표를 비롯한 대부분의 공범에게 1심과 같은 형량을 선고했다.

대법 “범죄집단 맞다”

그러나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이들이 범죄집단에 해당한다고 봐 2심에 사건을 돌려보냈다고 20일 밝혔다. 대법원 재판부는 범죄집단은 범죄의 계획과 실행을 용이하게 할 정도의 조직적 구조를 갖추면 된다고 봤다. 대표와 공범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의 조직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는 2심 재판부보다 더 넓은 해석이다.

범죄집단의 조건이 ▶특정 다수인이 범행을 수행한다는 공동목적을 갖고 ▶정해진 역할분담에 따라 행동하며 ▶범죄의 계획과 실행을 용이하게 하는 정도의 조직적 구조를 갖추고 ▶반복적 범행을 저지르면 된다는 판례가 생긴 셈이다.

“박사방 사건에도 판례 적용될 듯”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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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집단적 성착취 범행을 최초로 범죄집단으로 기소한 ‘박사방’ 사건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검찰도 이번 대법원의 판단이 자신들의 판단과 맞닿아있다는 입장이다. 공소사실에 따르면 박사방 조직은 영업적 성착취물 제작‧유포라는 공동의 범행 목적을 갖고 있었다. 또 피해자 유인 광고, 개인정보 조회, 자금조달 및 성착취 요구, 범죄수익 인출 등의 역할 분담이 이뤄졌다. 다양한 내부 규율을 만들고 범행을 지속하기 위해 분업 체계를 유지했고, 2019년 9월부터 이듬해 3월 조주빈이 검거되기까지 6개월 동안 범행이 계속됐다.

대법원 판결에 대해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범죄집단은 통솔체계가 필요하지 않고 역할분담이 있으면 족하다는 점을 확인해줬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박사방에서 특정 아이디로 소통하고, 역할을 분담해 수익 창출과 그들의 성적욕구 충족이 이뤄졌다면 범죄집단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박사방 사건의 경우 범죄집단이 인정된다면 주범 조주빈에게 내릴 수 있는 최대 형벌인 무기징역을 공범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가영 기자 lee.g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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