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경청

중앙일보

입력 2020.08.19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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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창규 경제 디렉터

김창규 경제 디렉터

롯데월드타워와 롯데월드몰 사이에는 잔디광장이 있다. 이곳을 조금 걷다 보면 5m 높이의 검은색 동상이 나타난다. 독일의 대문호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의 동상이다. 베를린의 한 공원에 있는 프리츠 샤퍼의 작품(1880년)을 본뜬 동상이 왜 이 자리에 서 있을까.

롯데 “열정” 현대 “이봐, 해봤어?”
삼성 창업자는 늘 “이야기해 봐라”
전진하려면 남의 말 귀기울여야

1942년 약관(弱冠)의 식민지 청년 신격호(1922~2020)는 83엔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수제 비누·포마드 등을 팔아 번 돈을 발판으로 48년 껌 회사를 세우고 이름을 ‘롯데’라 한다. 롯데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나오는 여주인공 이름 샤를로테 부프(Charlotte Buff)에서 따왔다. 베르테르가 샤를로테에 열정을 바친 것처럼 한때 문학도를 꿈꾸던 청년 신격호의 열정이 회사 ‘롯데’에 투영된다. “열정이 있으면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즐겁게 이겨낼 수 있다”는 그의 지론처럼. 이는 30년 숙원사업이던 123층 롯데월드타워 건설로 이어졌다. 한국의 랜드마크를 짓겠다며 88년 추진한 초고층 프로젝트가 여러 번 좌초될 뻔했지만 결국 2017년 완공했다. 괴테의 ‘롯데’가 그의 열정의 시작이었다면 롯데월드타워는 그 열정의 마무리였다.

1971년 현대 창업자인 고(故) 정주영(1915~2001) 회장은 현대중공업 조선소가 채 완공되기도 전 그리스 선주사를 찾는다. 달랑 조선소가 지어질 울산 백사장 사진과 5만분의 1 지도를 선주사에 내민다. 그리스 선주사 선엔터프라이즈의 리바노스 회장은 정 회장의 도전정신을 높이 샀고 유조선 두 척을 발주하기로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 생겼다. 선주사 측은 배 인도 시기를 약속보다 3개월 정도 앞당겨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소 간부는 당황했다. 작업 공정과 중장비 확보 등이 빠듯해 불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 회장은 “그렇게 합시다”라고 즉답했다. 현장임원의 읍소가 이어졌다. 이때 정 회장이 불쑥 한 마디 던졌다. “이봐, 해봤어?” 이런 도전정신 덕에 현대는 조선소 도크 완공과 동시에 26만t급 선박을 최단시일 내에 완성하고 진수시키는 초유의 기록을 달성했다.

서소문 포럼 8/19

서소문 포럼 8/19

정 회장은 훗날 이렇게 말했다. “만사는 된다고 생각하면 안 보이던 길도 보이고 안 된다고 생각하면 있는 길도 안 보이게 되는 법이야.”(『정주영 이봐, 해봤어?』) 정 회장의 도전 DNA는 한국에 최초라는 수많은 수식어를 남겼다.

삼성 창업자 고(故) 이병철(1910~87)  회장은 1979년 부회장으로 승진한 셋째 아들 건희를 불렀다. 붓글씨 쓰기를 즐긴 이 회장은 ‘경청(傾聽)’이라는 글귀를 써서 아들에게 건넸다. 이 회장은 또 자신의 뜻에 따라 36세의 나이에 신세계 경영에 뛰어든 막내딸 명희에게도 출근 첫날 조언을 한다. ‘어린이의 말이라도 경청하라’….

이 회장이 계열사 사장과 회의할 때 꺼내는 첫 마디가 항상 “이야기해 봐라”였다. 또 “사람을 얻으려면 사람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고도 했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게 필요하다.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라’는 뜻의 경청은 이 회장의 삶의 철학이었다. ‘경청’은 후계자인 아들, 손자를 거치며 삼성가의 경영철학이자 가훈(家訓)으로 자리 잡았다. 마산의 협동정미소에서 시작한 삼성은 전자·반도체까지 확장하며 세계적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기도 하고 무모하리만큼 과감하게 돌진하기도 하지만 창업자의 목적은 하나다. 창업한 회사가 후대에도 사회와 공존하며 건강하게 살아남는 것이다. “사업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미 이룩해 놓은 사업을 지켜간다는 것은 그 이상으로 어렵다”는 이병철 회장의 말에 고민이 깊게 배어있다.

국민의 피와 땀, 그리고 이들의 이런 노력이 켜켜이 쌓여 한국은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흔들린다. 부동산값이 천정부지로 오르자 정부와 여당은 대책을 일방적으로 쏟아낸다. 기업을 옥죄는 규제 법안도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한다. 시장의 우려는 뒷전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끼리 편 가르고 서로 손가락질한다. 부동산값 상승, 경기침체 탓에 빈부 격차는 갈수록 심해진다. 누가 국민을 이렇게 괴롭고 지치게 하는가.

일방적 독주는 속도감 있는 것 같지만 결국 파국을 부른다. 더딘 것 같지만 대화와 타협을 통해야 진정한 진전이 이뤄진다. 대화와 타협은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는 데서 시작한다. 권력이 있는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2020년 대한민국에 필요한 건 경청이다.

김창규 경제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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