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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전세, 월세의 역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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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 경제정책팀 차장

전수진 경제정책팀 차장

월세가 기가 막혀. 당(黨) 이름이다. 더불어민주당, 미래통합당 할 때의 그 ‘당’ 맞다. 미국에 실재하는 당명이다. 원어로는 ‘The Rent Is Too Damn High’인데, 비속어를 순화해 의역했다. 미국 정계의 풍운아, 지미 맥밀런(74·삽화 인물)이 2005년 창당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그는 1990년대부터 정계 진출을 시도하다 2010년 뉴욕시장 선거에서 이 구호를 띄우며 대히트를 쳤다. 한때 뉴욕시장 선거에서 0.3%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 의사까지 밝혔던 인물이다.

기행(奇行)도 일삼았다.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해줄 때까지 안 내려오겠다며 브루클린교에 매달린 건 귀여운 해프닝에 속한다. 후보 토론회에선 “하루 30시간, 매주 12일을 일해야 월세를 낼 수 있다”고 주장해 시청자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런데도 인기는 높았다. 뉴욕타임스(NYT) 등 유수 매체가 그를 집중 조명하며 공통으로 지적한 게 있다. 그의 언행은 대개 터무니없지만, 그래도 월세가 지나치게 높은 건 팩트이고, 유권자들이 표는 안 줬어도 마음은 줬다는 것.

노트북을 열며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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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맥밀런 편이다. 미국 부동산 컨설팅업체 포춘빌더스 닷컴의 올해 통계에 따르면 미국 주요 도시의 월세 평균은 약 200만원이다. 가장 비싼 샌프란시스코는 3500달러(약 415만원), 2위인 뉴욕시는 3000달러, 수도인 워싱턴DC는 2260달러가 매달 따박따박 월세로 빠져나간다. 코로나19로 실업률이 10.2%(7월 기준) 치솟으면서 현금이 모자란 일부 세입자들이 ‘월세 파업(cancel rent)’ 시위를 대대적으로 벌이는 배경이다. 현금이 없어 신용카드로 월세를 ‘긁기’도 한단다. 미국 정가에선 월세제를 손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국은 거꾸로 간다. 없던 월세를 만들고 있다. 거대 여당 인사들이 앞다퉈 “전세의 월세 전환은 정상”이라고 주장한다. 전세는 대부분의 해외 국가엔 없는 개념이기에 일부 영어사전에 ‘jeonse’로 등재도 돼 있는데, 이제 곧 사어(死語)가 될 처지다.

기자가 거주하는 비(非)강남 지역까지도 전세는 씨가 말랐다. 이러다 일본처럼 세입자가 집주인의 면접으로 선발이 되고 “나를 세입자로 받아줘서 감사하다”는 의미로 월세 한 달 분의 ‘레이킹(礼金·사례비)’을 지급하는 날이 근미래일 수도 있겠다. 수년 안에 한국판 ‘월세가 기가 막혀 당’이 창당되고 “50년을 집권하겠다”고 떵떵거리는 건 아닐지. 기계적 평등을 추구하다 애꿎은 전세 세입자가 월세 난민이 되는 일이 드라마 아닌 현실이다. 2020년은 이래저래 ‘뉴노멀’의 해인가 보다. 

전수진 경제정책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