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후남의 영화몽상

SF의 시간, 당신의 시간

중앙일보

입력 2020.08.18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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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후남 문화디렉터

이후남 문화디렉터

지구 곳곳에 정체불명의 외계 비행체가 나타난다. 이들은 왜 지구에 왔을까. 그걸 알기 위해 온갖 전문가가 동원되는데, 그중에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가 있다. 인간의 언어와 전혀 다른, 마치 붓으로 그린 도형 같은 외계 생명체의 언어에서 규칙을 찾고 의미를 알아내려 분투하는 주인공이다.

이렇게 펼쳐지는 ‘컨택트’(원제 Arrival)는 신선하고 묵직한 SF다. 원작인 테드 창의 소설만큼은 아니어도 언어학을 비롯한 전문분야에 대한 지식을 탄탄하게 펼쳐낸다. 놀라운 건 이런 지식보다도 상상력, 스포일러를 피해 두루뭉술 옮기자면 언어와 시간을, 현재에 미래를 결합하는 새로운 상상력이다. 3년 전 국내 개봉에서 썩 좋은 흥행성적을 거두진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원작자 테드 창의 명성을 처음 알게 해준 고마운 영화다.

‘컨택트’의 드니 빌뇌브 감독도 그랬겠지만, 테드 창의 SF는 읽어볼수록 영화화가 만만찮아 보인다. 분량은 대개 단편인데, 그 여운은 두고두고 곱씹게 된다. ‘컨택트’ 역시 미래를 안다는 것과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있냐의 문제를 넘어 인생의 의미나 인간의 숙명까지 떠올리게 한다.

‘테넷’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왼쪽)과 주연 존 데이비드 워싱턴. [사진 워너브러더스코리아]

‘테넷’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왼쪽)과 주연 존 데이비드 워싱턴. [사진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사실 주인공 루이스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가장 확실한 미래를 알고 있다.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다. 이 거대한 스포일러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인생이란 드라마는 기꺼이 희로애락의 전개를 수행한다. ‘컨택트’의 원작 소설 제목은 ‘네 인생의 이야기’. 이 영화는 결코 외계인 얘기가 아니다. 현재와 미래를 뒤섞는 SF의 설정이 매혹적인 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시간이 불가역적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SF는 이에 비하면 적어도 한 가지 출발점은 유리하다. 원작과는 경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미래의 아버지가 과거의 딸에게 신호를 보내는 ‘인터스텔라’의 상상력, 꿈속의 꿈에 중층적으로 들어가는 ‘인셉션’의 비주얼은 감독인 그가 직접 쓰거나 동생 조너선 놀란과 함께 쓴 시나리오가 바탕이다.

물론 SF에 걸맞은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하고 정교하게 구축하는 일이 쉬울 리는 없다. 다음 주 개봉을 앞두고 벌써 예매율 1위에 오른 놀란의 신작 ‘테넷’은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세상을 파괴하려는 세력에 맞서는 요원들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상영시간은 장장 2시간 30분에 달한다.

믿거나 말거나 놀란은 이 SF액션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다듬는 데 6~7년이 걸렸고, 아이디어 구상은 20년쯤 전부터 했다고 전해진다. 20년 전이면, 기억상실증으로 초단기 기억만 가능한 남자가 아내의 살인범을 추적하는 놀란의 데뷔작 ‘메멘토’가 만들어질 무렵이다. 시간의 힘이, SF소재로서 그 매혹이, 감독의 집요함이 새삼 놀라워진다.

이후남 문화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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