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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없다" 친모 폭언에도···나눠주는 삶 살다떠난 버핏 누나의 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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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런 버핏과 도리스 버핏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 [알렉산더 버핏 로젝]

워런 버핏과 도리스 버핏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 [알렉산더 버핏 로젝]

"우린 어려운 사람들을 계속 도울 수 있어. 돈이 부족하면 워런한테 전화하면 돼"  

세계적 투자자 워런 버핏의 누나 도리스 버핏.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그녀는 평생 불행한 사람들을 도운 자선사업가였습니다. 자신의 사재만 1억 5000만 달러(약 1781억 2500만원)를 털어 자선 재단을 세웠고, 2006년부터는 동생 워런 버핏에게 꾸준히 기부금을 받아 지원 사업을 이어왔습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에 따르면 도리스는 1996년 '선사인 레이디' 재단을 설립해 자선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가정폭력 희생 자녀, 교도소 수감자의 대학 학비를 지원하고 정신질환자를 돕는 일을 해왔습니다.

2006년 워런의 기부로 자선사업이 확대되면서는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선별해 그들을 직접 돕는 방식의 사업도 해왔습니다. 워런이 재산의 99%를 기부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자 사람들이 편지로 사연을 보내왔고, 워런은 편지를 모아 누나에게 기부금과 함께 전했습니다. 도리스가 직원들과 함께 사연을 선별해 돕는 일을 시작한 계기입니다.

워런은 2006년 보스턴글로브와의 인터뷰에서 누나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사람들은 남을 돕기 위해서 돈이나 시간을 씁니다. 나는 돈을 쓰지만, 시간은 쓸 수가 없습니다. 시간은 가장 희소한 자원입니다. 그런데 누나는 돈과 시간을 함께 써서 남을 돕습니다"라고요.

92세로 생을 마감한 도리스는 지난 4일(현지시각) 미국 메인주(州) 락포트의 자택에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세상을 떠났습니다. 도리스의 손자가 전한 바에 따르면 그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좋아했던 재즈 가수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어머니 폭언…'정신질환자 도와야겠다' 결심

버핏 삼남매. 왼쪽부터 워런 버핏, 도리스 버핏, 엘리엇 버핏. [알렉산더 버핏 로젝]

버핏 삼남매. 왼쪽부터 워런 버핏, 도리스 버핏, 엘리엇 버핏. [알렉산더 버핏 로젝]

얼핏 유복해 보일 법한 도리스의 삶도 상처와 굴곡투성이였습니다. 어머니 레일라 버핏의 정서적 학대, 유명한 투자자이자 정치인인 아버지 하워드 버핏의 잦은 부재, 네 번의 이혼, 1987년 미국 주식시장 대폭락 당시 전 재산을 잃을 뻔한 아찔한 기억도 있습니다.

도리스는 82살에 낸 자서전 '다 나눠주라(Give it all away)'에서 자선사업가로 살아온 자신이 겪은 어려움, 자선 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 등을 설명했습니다. 도리스의 자선은 그녀의 불행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편집자는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열두 살 소녀 시절의 기억은 어머니의 폭언으로 점철됐습니다. 어머니는 "너는 결코 사랑받지 못할 거야, 그럴 만한 가치가 없으니까"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린 도리스는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며 자신에게 나쁜 말을 쏟아내는 동안 벽장에 숨곤 했다고 했습니다.

그때 도리스는 스스로 속삭였습니다. "내가 40살이 되면 지금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야"라면서요.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동생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는 도리스에겐 힘든 어린 시절로 기억되는 곳입니다.

어머니는 진단은 받지 않았지만, 양극성 장애(조울증)를 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머니는 워런에게는 "대학에 가라"고 권유하면서도 도리스에게는 "너는 너무 멍청해서 대학에 등록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워런은 누나의 자서전을 읽고서는 "누나가 정신병에 걸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무리 긍정적인 성격의 도리스였지만 상처가 남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도리스는 “나는 (어머니에게서)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곤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경험은 도리스가 정신질환자를 돕는 계기가 됐습니다. 정신적 질환의 심각성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CEO. [AP=연합뉴스]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CEO. [AP=연합뉴스]

“운이 나빴을 뿐인 사람들 도와야”

도리스는 미국발 경제 대공황이 세계 경제를 암울하게 하던 시기에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파산한 사람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경제적 불행이 운에 많이 좌우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인종 차별 문제도 그를 자선사업에 뛰어들게 한 계기가 됐습니다. 도리스는 언론 인터뷰에서 15살에 겪은 일을 또렷이 기억한다고 말했습니다. 백인 친구 두 명과 길을 걷다가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흑인 가정부를 만나 인사를 건넸는데, 친구들이 “길에서 흑인과 얘기를 나누면 안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도리스는 ‘죄 없는 비운’으로 불행해진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시련은 계속됐습니다. 1987년 미국 주식시장 붕괴 때는 전 재산을 잃고 1200만 달러(142억 5000만원) ‘마이너스’를 기록한 적도 있었습니다. 결혼 생활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1951년 트루먼 스티븐스 우드와 결혼해 3명의 자녀를 뒀지만 이혼했고, 이후에도 3번 더 결혼했지만, 종착점은 이혼이었습니다.

도리스는 “남편 중에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지만, 도리스의 모든 불행은 타인을 도와야 한다는 결심을 계속 굳힐 뿐이었습니다.

이동식 주택, 장례비, 휠체어…구체적 지원도

도리스 버핏이 선샤인레이디 재단을 통해 지원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한 수혜자들과 함께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선샤인레이디 재단]

도리스 버핏이 선샤인레이디 재단을 통해 지원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한 수혜자들과 함께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선샤인레이디 재단]

도리스가 상속받은 유산과 경험에서 축적된 선행 의지는 선사인 레이디 재단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녀의 나이 68세 때 일입니다.

그녀의 자선사업으로 새 삶을 살게 된 수감자들, 어려운 청소년들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은행 강도죄로 15년을 복역한 스티븐 르위키는 도리스가 후원한 메인주(州) 교도소 내 칼리지 프로그램 덕택에 복역 기간에 전문대학 졸업생에게 수여되는 학사학위를 받고 석방 후 메인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현재 수감자들을 위한 단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스티븐은 “도리스의 진정성 있는 자선사업을 존경한다”라고도 말했죠.

도리스가 버핏에게 온 편지를 받고 선별 작업을 통해 도움을 준 사례들은 구체적입니다. 메인주에서 3명의 손자를 홀로 키우는 여성을 위해 이동식 주택을 사주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10대 손자의 장례비가 없는 미시간의 어느 노인에게 장례비를 지원했습니다. 2016년 보스턴 클로브에 따르면 이런 구체적인 사연에 대한 평균 지원금은 회당 4800달러(약 570만원)라고 합니다.

뉴욕시의 프레데릭스버그에 사는 가난한 아이들이 수영장에 가고 싶어도 비싸서 가지 못 한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수영장을 즉각 개방한 일화도 유명합니다. 도리스는 “내가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순 없지만, 그들이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다”고 말했습니다.

유산 안 남겼지만, 나스닥 기대주로 등극한 손자 

알렉산더 버핏 로젝. [기빙파운데이션]

알렉산더 버핏 로젝. [기빙파운데이션]

도리스는 남을 돕는 일이 즐거울 뿐이라고 말합니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도리스는 “나는 돈을 불리지도, 자식들에게 주지도 않을 것”이라며 “내가 자선사업을 하는 것은 세금 혜택을 보려는 것도, 천국에 가려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만, “이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엄청난 즐거움을 준다. 이를 모르는 삶은 너무나 힘들다”고 덧붙였습니다.

지난 6일 도리스의 별세 소식을 알린 건 도리스의 손자 알렉산더 버핏 로직이었습니다. 로직은 자신의 힘으로 나스닥 기대주로 등극한 인물입니다.

2017년 포천지에 따르면 로직 버핏이 공동 CEO로 있는 보스턴 오마하 코퍼레이션은 3분기 연속 33%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나스닥 시장에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할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기빙 파운데이션 등 기부재단 일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유산 대신 무형의 자산을 물려준 버핏 가문의 행보가 궁금해집니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외교안보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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