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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인간 엄마, 자살확률 95% 딸…간병로봇은 누굴 살릴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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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우주인 조안’. 조안 앞에 쉼표를 더한 제목의 원작 소설은 이오가 입는 사진 속 청정복에 문제가 밝혀지면서 이오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다는 설정이지만, 영화에선 불편한 청정복이 특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윤정 감독의 판단에 따라 항체주사 설정이 가미됐다. [사진 웨이브·MBC]

‘우주인 조안’. 조안 앞에 쉼표를 더한 제목의 원작 소설은 이오가 입는 사진 속 청정복에 문제가 밝혀지면서 이오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다는 설정이지만, 영화에선 불편한 청정복이 특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윤정 감독의 판단에 따라 항체주사 설정이 가미됐다. [사진 웨이브·MBC]

우주전쟁·외계인은 옛말이다. 존엄사·취업난 등 현대사회의 고민이 근미래 무대의 생활밀착형 이야기로 펼쳐진다. “사흘 뒤 지구가 멸망해도 내일의 면접을 고민하는 청춘”(『우주인, 조안』 김효인 작가의 말)처럼.

토종 OTT 웨이브·MBC 합작 ‘SF8’ #영화감독 8인이 SF소설을 작품화 #웨이브 이어 14일 MBC서 첫 방송 #안락사·미세먼지 등 사회이슈 질문

최근 젊은 작가들을 주축으로 르네상스를 맞은 한국 SF 문학이 영화·드라마로 확장되고 있다. 국내 SF 소설을 토대로 영화감독 8인이 만든 SF시리즈 ‘SF8’이 14일부터 MBC를 통해 매주 금요일 각 1편씩 방송 중이다. 토종 OTT 웨이브와 MBC가 공동투자하고 한국영화감독조합·수필름이 공동제작한 이 시리즈는 지난달 웨이브에선 전편을 한꺼번에 선보여 2주 만에 30만명이 시청했다. 각 50여분의 에피소드 8편이 한 묶음. 감독마다 인공지능·증강현실·재난·게임·초능력 등 각기 다른 상상을 펼쳤다.

총기획을 겸한 민규동 감독은 지난 10년간 성장해온 국내 SF 문학의 에너지를 밑바탕으로 꼽았다. 그는 “‘스타워즈’ ‘E.T.’ ‘터미네이터’ 등 할리우드 SF가 당대 기술혁신과 더불어 평소 보지 못한 다른 세계를 조우하게 해줬다면 최근 한국 SF 문학은 일상환경에 과학적 화두가 어떻게 스며들어있는지, 한국적 사유를 보여준다”면서 “원래 부제가 문윤성 작가의 1960년대 한국 최초 SF 소설에서 따온 ‘완전사회’였다. 더 나은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마찰음이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식물인간 홀어머니를 10년째 보살피며 심신이 지친 딸(이유영)에 대해 인공지능 간병로봇(이유영·1인 2역)이 “자살확률 95%”라 진단한다면 과연 두 사람 중 누굴 살려야 할까. 14일 방영된 민규동 감독의 연출작 ‘간호중’이 던진 가깝고도 낯선 화두다.

원작은 신예 김혜진 작가의 2017년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 가작 수상작『TRS가 돌보고 있습니다』(허블). 민 감독은 그 자신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어머니의 긴 간병 생활을 봤다”면서 “누구나 한번은 통과할 수밖에 없는 삶과 죽음과 간병의 시간에서 골병들어가는 보호자들의 시스템을 보면 답답하다. SF 형식을 통해 질문하면 좀 무겁고 무서운 이야기여도 그 속에서 깊이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했다.

‘SF8’ 8부작 중 ‘간호중’ 포스터. 식물인간 엄마를 모셔온 딸과 간병로봇 역할 모두 배우 이유영이 1인 2역했다. [사진 웨이브·MBC]

‘SF8’ 8부작 중 ‘간호중’ 포스터. 식물인간 엄마를 모셔온 딸과 간병로봇 역할 모두 배우 이유영이 1인 2역했다. [사진 웨이브·MBC]

특히 극 중 수녀(예수정)가 간병로봇 ‘간호중’과 나누는 대화 등은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한데 원작에선 수녀가 아니라 신부였고, 어머니를 간병하는 주인공도 여성이 아니라 중년 남성이었다. 주인을 빼닮게 디자인된 간호중이 주인에게 사랑을 느끼는 설정도 소설엔 없던 것이다.

김혜진 작가는 “소설 속 성별을 남성으로 잡은 건 내가 인물에게 너무 감정이입을 하게 될까 봐 일부러 거리 두려 애쓴 것도 있다”면서 “민 감독이 여성으로 바꾼다기에 좋은 선택이라 말씀드렸다”고 했다. 또 “내겐 관심사가 아니었던 로봇의 감정에 대한 감독의 연출이 흥미로웠다. 방송 후 트윗으로 로봇에겐 사랑이 돌봄에 필요한 기능이라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해석을 봤는데 원작자로서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반응이 반갑고 기뻤다”고 했다.

8편 모두 대개 여성이 주인공이다. ‘간호중’처럼 원작의 성별이 일부 바뀌어서다. 민 감독은 “미래를 구상하다 보면 여성들이 훨씬 더 많은 삶의 영역에서 주체적인 삶을 살거나 권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노골적인 새로움이 연상되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8편 중 ‘우주인 조안’도 현실적인 작품이다. 미세먼지로 뒤덮인 시대, 고가 항체 주사를 맞느냐 못 맞느냐에 따라 수명이 100세와 30세로 양분된다. 원작은 김효인 작가의 데뷔작 『우주인, 조안』. 안전가옥 앤솔로지 시리즈 중 지난해 출간된 『미세먼지』에 수록돼 있다. 올해 스물여덟인 김 작가는 “미세먼지에 대한 막연한 불안·공포에 방향을 잃고 사는 듯한 제 또래들의 시대적 고민을 풀어냈다”고 했다. 연출을 맡은 이윤정 감독은 “재난 상황에서도 경제적 계급 차이가 안전·생명 같은 근본적 인권까지 결정하는 세상이란 게 현실보다 더 진짜처럼 느껴졌고 그럼에도 27살 주인공은 여전히 취업이나 또래 사이 자존심 싸움 같은, 개인적인 문제로 고민한다는 게 설득력 있었다”고 전했다.

SF의 인기는 계속될 전망이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따르면 한국 SF 출판시장은 지난 10년간 5.5배 성장했다. 2017년 한국과학문학대상 중단편 대상을 받은 김초엽 작가의 지난해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은 1년 만에 10만부 판매고를 올렸다. 이보다 먼저 SF에 뛰어든 김보영 작가는 지난해 미국 최대 출판그룹 하퍼콜린스에 3편의 단편 번역출판권 계약을 맺었다. 송중기 주연의 우주선 블록버스터 ‘승리호’, 공유·박보검 주연의 인간복제 소재 ‘서복’ 등 SF 장편영화도 개봉을 기다린다.

민규동 감독은 “생각보다 많은 영화·드라마 기획이 진행되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어떤 작가는 모든 장·단편 판권이 대부분 팔렸더라. 조만간 폭발적인 임계점을 맞지 않을까 싶다”고 내다봤다. 이윤정 감독은 “SF 문학의 성공과 ‘SF8’의 실험에 영화계가 자극받아 SF라는 세계 안의 다양한 가능성을 영화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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