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아무것도 안 하는 날을 만들자

중앙일보

입력 2020.08.16 07:00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37)

길었던 장마와 기상이변의 끝이 이제야 보인다. 전국에서 들려오는 안타까운 소식들로 일상의 언저리가 눅진하다. [사진 pexels]

길었던 장마와 기상이변의 끝이 이제야 보인다. 전국에서 들려오는 안타까운 소식들로 일상의 언저리가 눅진하다. [사진 pexels]

유례없이 길었던 장마와 기상이변의 끝이 이제야 보인다. 전국에서 들려오는 안타까운 소식들로 일상의 언저리가 눅진하다. 태풍 장미가 북상한다는 소식이 들썩이던 날, 직장 삼 교대로 밤낮없이 일했던 딸이 큰맘 먹고 1박 휴가를 가겠단다. 아직 위험하다며 한사코 말려도, 친구들과 오래전 예약된 일정이라 물리기 어렵다며 빗속에 집을 나선다. 노동과 피로에 지친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안전교육을 단단히 하고 어두운 얼굴로 딸을 배웅했다.

남편은 지방에, 아들은 먼 직장에 있어 집에 자주 오지 못한다. 그나마 내 곁에서 사브작 대고 복작거렸던 딸의 기척이 한순간에 사라진 집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하지? 무엇부터 시작할까?’ 그동안 매일매일 딸과의 일상으로 채워졌던 내 안에 구멍이 뻥 뚫렸다. 내 안에 나도 모르던 공간이 있던 것일까? 그동안 모르고 지냈는데, 어느 순간 텔레비전 소리와 에어컨 소리, 선풍기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집 밖의 소음까지도 더 크게 내 속으로 파고든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반복되었고 창밖에서 울어대는 매미 울음소리는 누군가 볼륨을 한껏 키운 듯 더 크게 들려온다.

“저 매미들은 언제부터 저렇게 울고 있던 거지…? 나는 그동안 못들은 걸까…?” 딸아이가 갑자기 집을 비우면서 내게 다채로운 여백이 있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아무것도 안 하는 순간을 경험해 보니 그동안 빼곡했던 내 삶에, 하얀 메모장이 하나 더 생긴 기분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어쩌면 진짜 휴식이 아닐까 문득 드는 생각.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이것을 알게 해준 딸이 고맙기도 했다.

쉼 없이 돌아가는 기계도 전원을 끄고 잠시 식혀야 더 오래 가동될 수 있듯, 식물도 쉬고 바람도 쉬어간다. [사진 pixnio]

쉼 없이 돌아가는 기계도 전원을 끄고 잠시 식혀야 더 오래 가동될 수 있듯, 식물도 쉬고 바람도 쉬어간다. [사진 pixnio]

우리 가끔은 마음의 채도를 낮추자. 아주 잠시 불을 꺼 두어도 좋지 않을까. 쉼 없이 돌아가는 기계도 전원을 끄고 잠시 식혀야 더 오래 가동될 수 있듯, 식물도 쉬고 바람도 쉬어간다. 인간은 무언가를 비우기 위해 그 자리에 또 다른 것을 채우려는 본능이 있는 것 같다. 때로는 여행도, 다녀와서 더 피곤할 때가 있지 않은가. 어떤 날은 마음의 대문을 닫아보자.

꽃도 흔들리다 잠시 멈출 때 그때 숨을 쉰다. 등대도 쉬어가고 오래 흔들린 섬도 발 뻗고 쉴 때가 있지 않을까. 끝없이 흐르는 물도 풀잎과 바위에 기대어 잠시 쉬었다 흐르듯, 배낭 하나 짊어지고 세상 밖으로 나가듯, 우리 일상의 전원을 잠시 꺼보는 것은 어떨까. 아무 일도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내 속의 불을 꺼보자.

여름도 천둥 속에서 쉬었다 가고 바람도 나뭇잎 뒤에서 쉬었다 간다. 팍팍한 세상에서 우린 생각보다 많이 지쳐있다. 지친 우리도 가끔은 몸도 마음도 쉬었다 가자. 다람쥐도 나무에 오르다 잠시 멈추고 돌아보며 쉬는 그런 순간이 있다. 굴참나무도 열심히 성장하고 푸르러지다 문득 잎의 흔들림을 멈추고 쉬어간다. 앵두도 한껏 익다가 나뭇잎 뒤에서 휘파람 분다. 세 계절을 쉬지 않고 일한 대지도 겨울이면 흰 이불 속에서 잠든다.

우리도, 침 한번 꾹 삼키고 잠시라도 좀 쉬었다 가자.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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