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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목숨건 탈출···어선 구출돼도 돈 받고 군함도 넘겼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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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렬 재일사학자 기록으로 본 강제동원.1988년 나카노시마 화장장에서 바라본 군함도(하시마)가 보인다. [사진 국가기록원]

김광렬 재일사학자 기록으로 본 강제동원.1988년 나카노시마 화장장에서 바라본 군함도(하시마)가 보인다. [사진 국가기록원]

홋카이도, 후쿠와카의 탄광과 광산. 제철소와 군수공장, 비행장과 도로….

재일사학자 김광렬이 50여년 간 남긴 강제징용 기록

 일본 곳곳엔 강제동원된 조선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독립운동가였던 부친의 유해를 찾기 위해 시작했던 기록 찾기 50년. 재일사학자인 김광렬(1927~2015)은 “강제동원됐다는 조선인의 유골이 있다”는 소식을 듣기만 하면 카메라와 펜을 챙겨들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기록하고 녹음해 남긴 2306권, 13만8579매의 기록은 일제 강점기 때 강제동원된 조선인에 대한 기록으로 남았다.

 국가기록원은 14일 김 선생이 2017년 기증한 문서와 사진을 엮어 『기억해야 할 사람들-강제동원, 김광렬 기록으로 말하다』를 발간했다. 그의 기록 속엔 탄광이 폐쇄되고 도시가 개발되면서 사라지고 있는 군함도(하시마)와 다카시마 등 조선인이 강제동원됐던 탄광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김광렬 재일사학자가 남긴 조선인 강제동원 기록 [사진 국가기록원]

김광렬 재일사학자가 남긴 조선인 강제동원 기록 [사진 국가기록원]

가만히 있으면 그 역사는 어디서 찾습니까

 후쿠오카 일대를 돌아다니며 강제동원의 흔적을 기록한 그는 오랜 시간 기록을 남긴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들이 저런 것을 다 메워버리고 나면 우리 역사는 다 지워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여기서 고생하고 눈물 흘리고 죽고 살고 그 역사가 다 있는데. 전부 다 무너져가고 있다. 나는 모른다 하고 가만히 있으면, 그 역사는 어디서 찾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탄광과 광산 지역이 도시 개발로 사라지면서 그곳에서 땀과 눈물을 흘리며 일한 조선인의 역사를 그냥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특히 '군함도'로 알려진 하시마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전면이 콘크리트로 깎아지른 듯 서 있는 낭떠러지다. 섬을 탈출하려는 자에게는 바다로 뛰어드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그래서 행방불명, 그리고 어선 등에 구출되어 넘겨지면 반죽음을 맞았고, 어선은 상금을 받았다고 한다.'

김광렬 재일사학자 기록으로 본 강제동원. 군함도와 화장장에서 바라본 군함도 풍경을 비롯해 강제동원에 끌려갔던 조선인들의 기록이 담겨있다. 사진은 1976년에 촬영한 아소 요시쿠마갱 조선인 숙소. [사진 국가기록원]

김광렬 재일사학자 기록으로 본 강제동원. 군함도와 화장장에서 바라본 군함도 풍경을 비롯해 강제동원에 끌려갔던 조선인들의 기록이 담겨있다. 사진은 1976년에 촬영한 아소 요시쿠마갱 조선인 숙소. [사진 국가기록원]

기록에 남긴 강제징용 조선인의 목소리

 일본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한다. 이후 1945년 패망선언까지 일본 곳곳의 탄광과 광산, 제철소엔 조선인이 강제동원됐다. 비행장과 도로, 철도 건설 현장에도 조선인이 있었다. 김광렬은 당시 동원됐던 조선인을 만나 이 역시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만난 김갑득씨는 1926년 2월 태어나 '징용장'도 없이 끌려갔다고 했다. 17살이던 1943년 야마구치현 우베오키노야마탄광에서 일을 했다. 김광렬이 기록한 그의 말이다.

 “(징용장이 나왔던가요?) 영장도 없어요. 아무 예고 없이, 그냥 오면 끌어가는 거죠. 밤에도 끌어가고 낮에도 끌어가고. 어휴 배고파도 말도, 아주 그게 제일 죽을 고생이었죠. 밥이 쌀밥이나 되나? 콩깻묵이라고 그러잖아요. 그것하고 거기다 쌀 드문드문 들게 하고, 보리쌀 드문드문 들게 하고, 저 국은 그게 무슨 국이었던가? 된장국이. 된장국하고 단무지라고 빨간 무. 그것하고 딱 두 가지예요. 끝까지 그렇게 먹었죠. 전쟁 끝날 때까지”

폐쇄 작업에 들어간 다카시마 탄광. 이곳에도 수많은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이 일을 했다. 재일사학자 김광렬씨가 1986년 촬영한 탄광의 모습. [사진 국가기록원]

폐쇄 작업에 들어간 다카시마 탄광. 이곳에도 수많은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이 일을 했다. 재일사학자 김광렬씨가 1986년 촬영한 탄광의 모습. [사진 국가기록원]

 충남 서산이 고향인 박용식 씨 역시 17살이던 44년에 지쿠호 탄전에 동원됐다. 박씨의 말이다.
“순경이 우리를 회관에 넣고서는 문을 딱 잠그는 거여. 거기는 나 같은 사람만 넣는 데여. 갈 사람만. 스무 살이 됐든 서른 살이 됐든, 그때는 숫자 파악을 해서 가니까. 연령 제한이 없고. 그냥 끌려가는 거지. 갔다 온 사람 중에 지금은 다 죽고 나 하나 살았어. 다 죽었어. 일본서 나와서 죽은 사람, 거기서 죽고 묻은 사람, 그렇게 해서 지금 거기서 나와서 죽음 사람 빼고 나 하나 살았어. 그냥 '가자'면 가는 거요. 그래서 창고에다 갖다 놓고서, 복장도 가마니 칠 때 그 복장 그대로 갔어요.”

 군함도인 하시마까지 동원된 문갑진씨는 23살에 탄광으로 강제동원됐다. 문씨는 3년 뒤인 1944년 8월 하시마 탄광으로 전환배치를 받았다. 그는 하시마에 가보니 "죽었다 싶었다"고 말했다. 나올 때 월급을 받았냐는 질문에는 "돈이 어딨습니까, 어찌나 벼룩이 많던지 밤새 뜯기고 죽을 고생을, 그래서 영양실조 안 걸리고 살아왔는게 참 내 명 길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김광렬 재일사학자 기록으로 본 강제동원. 사찰에 강제동원됐다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조선인의 유골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카메라를 들고 달려가 이를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사진 국가기록원]

김광렬 재일사학자 기록으로 본 강제동원. 사찰에 강제동원됐다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조선인의 유골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카메라를 들고 달려가 이를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사진 국가기록원]

 이소연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장은 “이번 사진집은 김광렬 선생이 기증한 방대한 기록을 1차 정리·해석한 것으로, 강제동원의 실체를 재구성하기 위한 먼 여정의 첫걸음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앞으로 많은 연구자가 참여해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돼 체계적으로 정리, 분석해 나가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번에 발간된 이 책은 국가기록원 누리집(www.archives.go.kr)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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