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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경들만 몰랐던 헝겊의 정체···박계리 ‘독립군 나무’ 아시나요

중앙일보

입력

삼엄한 감시망 피해 밀서 전달한 독립군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에 있는 독립군 나무. 최종권 기자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에 있는 독립군 나무. 최종권 기자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 마을 입구에는 ‘독립군 나무’로 불리는 느티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수령 350년, 높이가 20m에 달한다. 영동군이 1982년 11월 보호수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한 뿌리에서 두 그루의 나무가 뻗어 나와 둘레가 10m를 넘고, 한 그루 지름은 3.5m 정도다.

충북 영동 학산면 박계리 독립군 나무 눈길 #독립투사에 일제 잠복 상황 알리는데 활용 #3·1운동 때 독립선언서 남부지방 전달 도움

 이 나무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독립군의 안전을 지켜줬다는 데서 ‘독립군 나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나무가 서 있는 길목은 오래전 서울과 전라도를 이어주는 지름길이 있었다. 동쪽으로 경북 김천, 서쪽으로 충남 금산, 남으로 전북 무주, 북으로는 서울로 갈 수 있는 요충지였다.

 최연서(67) 박계리 이장은 “지금이야 고속도로가 잘 닦여있지만, 과거 박계리는 서울로 가는 주요 길목이었다”며 “독립군 나무가 있는 자리에는 과거 국가의 공문서를 전달하고 관리의 운수를 돕는 역참(驛站)과 숙소 역할을 했던 원(院)이 있었고, 관리인도 20명이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남부지방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독립투사들 역시 이 마을을 지났는데 이를 간파한 왜경이 잠복근무를 하며 검문을 하고, 여관이나 민가에 들이닥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에 있는 독립군 나무. 최종권 기자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에 있는 독립군 나무. 최종권 기자

 마을 주민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알리기 위해 독립군 나무를 사용했다. 느티나무에 흰 헝겊을 달면 ‘왜경이 없음’, 흰 헝겊이 달리지 않으면 ‘왜경이 있으니 조심하시오’란 신호였다. 빨간색이나 노란색 띠를 묶어 감시 상황을 알리기도 했다. 나무가 높아서 3~4㎞ 떨어진 숲에서도 가지에 달린 표시를 쉽게 볼 수 있었다.

 3·1운동 때에는 서울에서 남부지방으로 독립선언문을 전달하는 데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주민 이종철(74)씨는 “숲속에 숨어있던 독립군들이 느티나무에 걸린 헝겊을 보고 안전하게 길을 지나갔다”며 “일본인의 감시를 피해 전국 규모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독립군 나무가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일제가 물러간 뒤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를 ‘독립군 나무’ 또는 ‘독립투사 느티나무’로 부르고 있다. 독립군 나무에 대한 사연이 알려지면서 광복절이 되면 박계리를 찾는 학생들과 사진작가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영동군은 2018년 나무 주변에 둘레석을 두르고 정자도 새로 지었다. 주민들은 나무 주변에 쓰레기를 줍거나 풀을 깎는 등 경관을 보호하고 있다. 주민 김이선(64)씨는 “수많은 애국지사의 넋이 깃든 독립군 나무는 마을의 수호신 같은 존재”라며 “지금처럼 건강한 모습을 오래도록 유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동=최종권 기자 choig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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