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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14일은 쉬고 17일 근무…택배 없는 날? 숙제 미루는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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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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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은 사상 최초로 지정된 ‘택배 없는 날’이다. 코로나19 등으로 급증한 택배 물량을 실어나르는 택배기사들의 노고에 공감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현장에선 ‘택배 없는 날이 아니라 숙제 미루는 날’이란 얘기가 나온다. “당장은 좋아도 수합된 택배가 없어집니까? 쉬고 난 다음 날은 명절 때보다 더 힘들 텐데 휴가 없이 (배송)하는 게 낫죠.” 택배기사 A씨의 말이다. 결국 택배업계는 업무 폭증을 우려해 정부가 정한 임시공휴일(8월 17일)은 쉬지 않기로 했다.

“쉰다고 물량 없어지나, 더 힘들어” #새 근로형태 맞는 제도 마련해야

택배기사들은 택배회사와 직접 고용계약이 아니라 구·동 단위의 대리점과 배송계약을 맺고 일한다. 법적 지위도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직원이 아닌 개인사업자처럼 일하는 ‘특수고용노동자’다. 이 때문에 법정 근로시간 제한이없어 과로 위험을 키우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택배기사들이 모두 직접고용을 원하는 건 아니다. 더 많이 배달할수록 수익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한 택배기사는 “많이 뛰어서 월 550만원 정도를 번다”고 귀띔했다. 전국 택배 노동자 5만 명 가운데 택배노조 가입자가 약 2500명에 불과한 것도 워낙 개인별로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다.

일회성 휴일이 해답이 될 수는 없다. 핵심은 위·수탁 계약관계가 가진 장점을 살리면서 노동자 혹사라는 단점을 보완할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일이다. ‘직영이냐 아웃소싱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논쟁에서 벗어나 기존 노동법에 매이지 않은 새로운 제도가 나올 때가 됐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올해부터 일하는 사람이 고용주의 통제와 지시를 받지 않고, 본인만의 고객층을 갖는 등 해당 분야에서 독립적인 사업을 구축해야 개인사업자이고, 이런 조건을 입증하지 못하면 근로자로서 보호받게 하는 ‘AB5’ 법안을 도입했다. 일부 국내 택배사가 대리점과 노동자 사이의 계약서에 ‘물량축소 요청제’를 명시하도록 한 것도 합리적인 시도다. 택배기사가 자신의 배송물량을 줄이고자 할 때 대리점에 요청해 협의할 수 있는 조항이다.

기술 측면에선 터미널에 자동분류기만 설치해도 택배기사들의 업무 부담을 상당 부분 덜 수 있다. 본업인 배송도 힘든데, 분류 작업 하다가 기진맥진하는 현실이라면 기업 입장에서도 서비스 질 향상을 위해 기꺼이 투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앞으로 택배기사뿐 아니라 플랫폼 노동자 등 비정규직 형태로 일하는 사람들은 더 늘어날 것이다. 정부가 서두를 일은 언 발에 오줌 누기가 될 ‘택배 없는 날’ 같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새로운 근로 형태에 맞는 제도를 고민하고 마련하는 것이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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