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없는 날? 미루는 날" 쉬고 나면 명절보다 더 힘들다

중앙일보

입력 2020.08.13 07:00

업데이트 2020.08.13 07:13

지난 7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8월 14일을 택배없는 날로 지정하라!'기자회견에서 참석자가 택배 없는 날 지정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7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8월 14일을 택배없는 날로 지정하라!'기자회견에서 참석자가 택배 없는 날 지정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한해 택배로 오간 물품이 28억개인데 업계에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으로 비대면 쇼핑이 늘면서 물량이 30% 이상 급증한 것으로 본다. 급기야 8월14일 ‘택배 없는 날’까지 등장했다. 택배기사들에게 휴식을 주자는 민주노총 산하 전국택배연대노조가 제안했는데, CJ대한통운·한진·롯데·로젠 등 4개 택배사가 참여했다. 특히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택배가 조금 늦어지더라도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글을 올리면서 우정사업본부와 지자체들도 앞다퉈 동참을 선언했다. 사실상 거국적 캠페인이다.

[현장에서]

"택배 없는 날 만들면 택배 물량 줄어드나" 

택배기사들의 노고에 공감하는 건 당연하지만 이런 일회성 휴일은 결코 해답이 아니다. 오히려 근본적 해결을 미루는 가림막이 될 수 있어 우려스럽다. 실제 현장에선 ‘택배 없는 날이 아니라 숙제 미루는 날’이란 얘기가 나온다. “당장은 좋아도 수합된 택배가 없어집니까? 쉬고 난 다음 날은 명절 때보다 더 힘들 텐데 휴가 없이 (배송)하는 게 낫죠” 택배기사 A 씨의 말이다. 소비자가 하루 이틀 주문을 안 한다고 해도 그때뿐이다. 결국 택배업계는 14일 쉬더라도 업무 폭증을 우려해 정부가 정한 임시공휴일(8월 17일)을 쉬지 않기로 했다.

서울 송파구 서울복합물류센터 내 롯데글로벌로지스 동남권물류센터에서 근로자들이 택배물을 정리하고 있다. 뉴스1

서울 송파구 서울복합물류센터 내 롯데글로벌로지스 동남권물류센터에서 근로자들이 택배물을 정리하고 있다. 뉴스1

택배기사들은 택배회사와 직접 고용계약이 아니라 구·동 단위의 대리점과 배송계약을 맺고 일한다. 법적 지위도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직원이 아닌 개인사업자처럼 일하는 ‘특수고용노동자’다. 이 때문에 법정 근로시간 제한을 받아 과로 위험을 키우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택배기사들이 모두 직접고용을 원하는 건 아니다. 더 많이 배달할수록 수익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한 택배기사는 “많이 뛰어서 월 550만원 정도를 번다”고 귀띔했다. 실제 쿠팡에 정규직으로 고용된 ‘쿠팡친구(전 쿠팡맨)’는 더 일하고 더 버는 행위가 제한된다. 대신 주 5일 근무와 연차 등을 보장받기 때문에 이번 택배 없는 날과는 관련이 없다. 전국 택배 노동자 5만명 가운데 택배노조 가입자가 약 2500명에 불과한 것도 워낙 개인별로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다.

노동자 혹사 어떻게 막을지가 관건 

결국 핵심은 위·수탁 계약관계가 가진 장점을 살리면서 노동자 혹사라는 단점을 보완할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일이다. ‘직영이냐 아웃소싱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논쟁에서 벗어나 기존 노동법에 매이지 않은 새로운 제도가 나올 때가 됐다.

택배회사든 택배기사든 계약관계의 장점만 취하고 의무는 저버린다면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일례로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올해부터 일하는 사람이 고용주의 통제와 지시를 받지 않고, 본인만의 고객층을 갖는 등 해당 분야에서 독립적인 사업을 구축해야 개인사업자이고, 이런 조건을 입증하지 못하면 근로자로서 보호받게 하는 ‘AB5(Assembly Bill 5)’ 법안을 도입했다. 일부 국내 택배사가 대리점과 노동자 사이의 계약서에 ‘물량축소 요청제’를 명시하도록 한 것도 합리적인 시도다. 이는 택배기사가 자신의 배송물량을 줄이고자 할 때 대리점에 요청해 협의할 수 있는 조항이다.

기술 측면에선 터미널에 자동분류기만 설치해도 택배기사들의 업무 부담을 상당 부분 덜 수 있다. 터미널에 도착한 택배를 자신의 구역에 따라 분류해 차에 싣는 ‘분류작업’은 통상 5~6시간을 매달려야 끝난다. 본업인 배송도 힘든데, 분류 작업 하다가 기진맥진하는 현실이라면 기업 입장에서도 서비스 질 향상을 위해 기꺼이 투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코로나 19로 디지털 기반 경제는 이미 현실이 됐다. 앞으로 택배기사뿐 아니라 플랫폼 노동자 등 비정규직 형태로 일하는 사람들은 훨씬 더 늘어날 것이다. 정부가 서두를 일은 언 발에 오줌 누기가 될 ‘택배 없는 날’ 같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새로운 근로 형태에 맞는 제도를 고민하고 마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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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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