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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사람조차 "부끄러워 낯 못들겠다"는 통합당 총선 반성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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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4.15 총선 참패 분석을 위한 백서제작특별위원회 1차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4.15 총선 참패 분석을 위한 백서제작특별위원회 1차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패배 원인을 남 탓으로 돌리지 않고 내 잘못은 없는지 잘 살펴보는 그런 회의체를 운영하겠습니다.”  

지난 6월 22일 미래통합당의 21대 총선백서 제작의 총괄을 맡은 정양석 특위 위원장의 발언이다. 백서에 통렬한 자기반성을 담아내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그 결과물이 13일 오전 당 비상대책위 회의에 보고된 뒤 국민에게 공개된다. 그러나 “남 탓하지 않겠다”는 정 위원장의 장담과는 달리, 특위에서조차 “남이 남 얘기하듯 쓰였다”는 비판이 나왔다.

“패배 책임 가려 이름 넣자” 공감대 #당 안팎 이해당사자 엉키며 표류 #“황교안 탓”“김형오 탓” 떠넘기기 #두루뭉술 반성문에 “낯부끄럽다” #김종인 “당, 박근혜 사태 사과해야”

이유는 뭘까. 백서 제작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백서 출간 뒤 당 분란을 피하기 위해서 총선 참패에 대한 책임을 일일이 적시하지 못했다”고 했다. 총선이 끝난 지 4개월이나 지난 시점에서 굳이 잘못을 들춰내는 게 당에 도움이 안 된다는 취지다. 정 위원장도 특위 위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당시 황교안 대표와 김형오 공천관리위원장 등 책임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난 상태라 비판하기 모호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반성문이 맹탕이 돼 버렸다”는 자조 섞인 반응이 나왔다.

중앙일보가 입수한 초안 원고에 따르면 백서는 A4용지 141쪽 분량이다. 참패 원인으론 열 가지가 제시됐다. 비교적 국민 정서와 가까운 출입기자단의 설문조사를 통해 상위에 랭크된 순서대로 적었다고 한다. ①중도층 지지 회복 부족 ②막말 논란 ③공천 논란 ④당 차원 전략 부재 ⑤탄핵에 대한 입장 부족 ⑥40대 이하 연령층의 외면 ⑦코로나19 영향 ⑧강력한 대선 후보군 부재 ⑨공약 부족 ⑩여권의 재난지원금 지급 추진 등의 순서다.

미래통합당 총선참패백서제작특위가 만든 21대 총선 백서 초안 표지. [중앙포토]

미래통합당 총선참패백서제작특위가 만든 21대 총선 백서 초안 표지. [중앙포토]

당초 특위는 총선 참패의 원인을 ▶중앙당의 선거 전략 부재 ▶공천 실패 등 크게 두 가지에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종의 반성문 격인 백서에 총선 참패에 책임이 있는 인사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자는데도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런 기류가 꺾이게 된 데는 당 안팎의 각종 이해당사자가 개입하면서부터라고 복수의 특위 관계자가 전했다.

백서 제작의 변곡점이 된 건 지난달 16일이라고 한다. 이날 특위는 21대 총선 공천관리위원이던 김세연 전 의원과 최대석ㆍ이인실 교수의 의견을 청취했다. 이날 만남은 공관위원들이 먼저 요청해 성사됐다고 한다. 또 다른 특위 위원은 “공관위원들은 공천 당시 공관위가 전권을 갖지 못했고, 당 공천 시스템이 부실했다는 등 사실상 황교안 대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식의 발언을 했다”고 전했다.

공관위 측이 '황교안 책임론'을 꺼내자 일주일 뒤 특위는 당시 사무총장이던 박완수 의원을 불러 총선 당시 당 지도부의 입장을 들었다. 이 자리에서 박 의원은 김 전 의원 등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김형오 공관위원장 등 공관위의 패착과 '오버' 등을 진술했다고 한다. 사실상 4·15 총선 참패의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양측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모양새였다. '황교안 대 김형오'의 대리전 양상마저 보였다.

이처럼 양측이 예민하게 충돌하자 특위는 결국 백서에서 공천 논란과 관련한 현상만 묘사할 뿐, 잘잘못에 대한 특위 차원의 가치판단을 철저히 배제했다. "겉으론 기계적 균형을 취했지만 결국 아프게 곪은 살을 도려내야 할 특위마저 비겁하게 뒤로 숨은 거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김종인 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원인을 제대로 진단해야 정확한 처방이 나올 수 있다”(6월 백서특위 임명장 수여식)고 했다. 그는 최근 총선 참패 원인 중 하나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당의 명확한 입장 표명이 없었다는 지적이 나오자 이와 관련한 ‘대국민 사과’를 고심 중이다. 하지만 그 사과가 울림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복수의 특위 관계자는 “솔직히 부끄러워 낯을 들지 못하겠다"고 토로했다. 통합당은 아직 반성문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수준이다.

김기정 기자 kim.ki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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