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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의대 정원 확대, 의사들 주장도 경청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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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대하 내과 전문의 대한의사협회 홍보이사

김대하 내과 전문의 대한의사협회 홍보이사

나라가 의지를 갖고 추진하는 정책을 의사들이 막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현장의 절절한 사정은 밤새워 설명해도 모자라지만 ‘밥그릇 챙기기’라는 한 마디로 매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부의 일방적인 의대 정원 확대에 젊은 의사들이 공개적으로 반발하고 있지만, 사회적 반향은 미미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비난의 화살이 날아들고 있다. 어떤 주장인지 들어보기도 전에 집단 이기주의라며 십자포화부터 퍼붓는다. 카메라 앞에 고개 숙이며 “만나서 대화하자”는 영혼 없는 말만 반복하는 정부 당국자의 모습이 요즘 날씨만큼이나 답답하다.

의사 ‘밥그릇 챙기기’ 비난 이전에 #모순투성이 의료현장 정상화 필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상황에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지만 적어도 보건의료 영역에서 거버넌스(협치)는 실종된 것이 현실이다. 정부가 의사들을 정책 파트너로 여기지 않듯이 우리나라 의사 양성 과정도 지역사회에서 의사들의 장기적인 역할이나 일생 활동에 대한 고민보다는 일시적 도구로 활용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전문의가 되기 위해 수련 받는 전공의는 근로자이면서 동시에 교육생이다. 처우가 열악하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참고 견디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병원은 주당 100시간씩 일하는 전공의가 한 명 있으면 전문의 두세 명을 덜 고용할 수 있다.

전공의의 ‘미친 가성비’가 병원 경영에 필수인 셈이다. 의료계에서 유달리 병원협회만이 정부의 의사 인력 증원 방안에 찬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으로 병원은 법으로 지역에 묶인 전문의의 채용 과정에서도 유리한 입장에 설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 의사는 젊고 열정적인 한 때를 ‘일회용 건전지’처럼 병원에서 소모한 뒤 전문의 자격증 한장 들고 병원문을 나선다. 청춘을 갈아 넣은 대가로 익힌 의술의 단가가 다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과는 비교조차 힘들 정도로 낮다.

그래서 365일 무휴나 야간진료 등을 통해 다른 나라 의사보다 2~3배 많은 환자를 진료할 수밖에 없다. 의료기관은 자연스럽게 인구가 많은 곳에 들어설 수밖에 없고, 돈 안 되는 과목은 배운 것을 살려 취직할 곳도 찾기 힘들다.

특히 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 등 필수의료 전문의들은 생명을 다루는 특성상 높은 사고 위험과 소송 부담까지 떠안는다. 그 결과 산부인과 전문의는 매년 100명 이상 늘어나지만 정작 분만을 하는 의료기관은 10년 동안 반으로 줄었다. 배출된 흉부외과 전문의의 절반이 다른 분야에서 진료하고 있다.

이런 모순적이고 비정상적인 상황을 정상화하는 것이 취약지와 비인기 필수분야 의사 인력을 확충하고 의료 공공성을 강화하는 근본적인 방법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새로 뽑는 의대생들의 지역 근무를 법으로 의무화하고 정부가 정해준 전공과목을 지키지 않으면 의사면허를 취소하겠다고 위협한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필수 의료를 전공하는 것이 ‘슬기롭지 못한 의사 생활’이 되는 현실에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의사들은 ‘밥그릇 지키기’에 혈안이 된 기득권, 심지어 적폐라고 비난받는다. 하지만 그들은 지난 2월 코로나19 확산 시점에 누가 시키지도 않은 상황에서 운영하던 병·의원 문을 닫고 대구·경북으로 달려갔고, 각 지역에서 코로나에 맞서 몸을 갈아 넣었던 바로 그 의사들이다.

‘코로나 의병(義兵)’은 특출난 소명의식이나 도덕성을 갖춘 의사가 아니라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의사들이었다. 이들은 영웅 대접을 바라지 않는다. ‘덕분에’ 같은 일회성 이벤트보다는 최소한의 존중을 더 원한다.

정부의 보건의료정책은 전문가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추진된다. 모순투성이인 의료 현장에서 자존심에 상처받고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보통 의사들은 지금 의료 공공성을 앞세운 정책 때문에 더 절망한다.

김대하 내과 전문의·대한의사협회 홍보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