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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조가 있는 아침

(33) 경세가(警世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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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유자효 시인

유자효 시인

경세가(警世歌)
김수장 (1690∼?)
검으면 희다하고 희면 검다하네
검거나 희거나 옳다할 이 전혀 없다
차라리 귀먹고 눈감아 듣도 보도 말리라

- 해동가요(海東歌謠)


시조로 노래한 정치적 허무주의

이쪽이 검다고 하면 저쪽은 희다고 한다. 한편이 희다고 하면 또 한편은 검다고 한다. 상대방의 의견에 옳다고 할 이는 전혀 없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귀먹고 눈 감아서 듣지도 보지도 말아야겠다. 이 시조는 경종 때 병약한 왕의 후사를 두고 노론과 소론이 벌이는 당쟁을 보고 당대의 가객인 노가재(老歌齋) 김수장(金壽長)이 시조로 읊은 것이다. 양극단만 있을 뿐 타협이나 중도는 발붙일 곳이 없는 정치적 허무주의를 읊은 것이다. 이 당쟁은 결국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번져 노론의 4대신과 60여 명의 인재가 역모로 몰려 투옥되고, 죽고, 유배되었다.

시대의 숱한 인재들을 파멸로 몰고 간 정치적 독선과 독단은 늘 있어 왔다. 여기에서 싹트는 절망과 허망함이 많은 지식인을 스스로 초야에 묻히게 했다. 굴원(屈原)의 초사(楚辭) 이후 이런 비명들은 시로 남았다. 김수장은 김천택과 더불어 숙종·영조 시대를 대표하는 쌍벽의 가인(歌人)이다. 영조 45년(1769년)까지도 자신이 편찬한 가집의 보수작업을 한 것으로 보아 80세가 넘도록 생존하였다. 이전까지 익명으로 전해지던 사설시조에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전하는 그의 시조는 129수에 이른다. 서울 화개동(花開洞)에 머물며 가악 활동을 주도했으며 조선시대 3대 시조집의 하나인 해동가요를 편찬하였다.

유자효(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