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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0만원 한번에 넣고 0→78만원 연금 매직, 이제 힘들어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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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신성식 기자 중앙일보 복지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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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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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A(60)씨는 1995년 국민연금에 가입했다가 두 달 보험료를 내고 중단했다. 국민연금을 잊고 살았다. 지난해 만 60세가 되면서 ‘임의계속 가입자’가 됐다. 국민연금은 만 59세까지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돼 있지만 그 이후에도 본인이 원하면 임의로 계속 가입할 수 있다. A씨는 주변에서 국민연금 보험료 추후 납부(추납) 제도를 활용하라는 권유를 받고 과거 안 낸 23년 10개월치 보험료 2600만원(월 9만여원)을 한꺼번에 냈다. 이 덕분에 노후연금 0원에서 월 45만7000원 수급자가 됐다.

[신성식의 레츠 고 9988] #정부·여당 국민연금 추납 개편 #여유층 재테크 수단 변질 지적 #최대 10년까지만 허용하거나 #학업·육아기간 등에 제한할 듯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서울 송파구 B(49)씨는 1990년 국민연금 가입 후 8개월만 보험료를 냈는데, 지난해 밀린 20여년치의 보험료를 냈다. 1억150만원이다. 추납 가능한 보험료의 최대치를 냈다. 덕분에 연금이 35만원에서 118만원으로 늘었다. 50세 C씨는 지난해 23년7개월치 보험료 4330만원을 냈다. 그 전에 낸 보험료가 7개월치 밖에 안 됐는데, 추납 덕분에 예상연금액이 0원에서 78만원이 됐다.

국민연금 추후납부(추납) 제도는.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국민연금 추후납부(추납) 제도는.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추납제도는 이렇게 마법처럼 연금을 변화시킨다. 추납은 꼭 필요한 제도다. ▶과거에 실직·사업실패 때문에 보험료를 못 냈거나(납부예외자) ▶경제활동을 하다 결혼과 동시에 전업주부가 된 사람에게 늦깎이 노후준비 기회를 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필요성 때문에 추납 대상이 확대됐다.

하지만 세 사람처럼 일종의 ‘연금 재테크’ 수단이 됐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성실하게 다달이 보험료를 내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정부·여당이 손대기로 했다. 이스란 보건복지부 국민연금정책과장은 11일 “추납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이들이 몇천만원을 추납하고 연금을 받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며 “어떤 식으로든 추납 자격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과장은 “추납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많고 성실 납부자와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 선진국은 육아·학업 등 불가피한 기간만 추납을 허용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국회와 상의해 제한 기준을 마련할 방침이다.

이와 관련, 더불어민주당 김상희 의원은 지난달 초 추납 기간을 10년 미만으로 제한하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매년 증가하는 국민연금 추납.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매년 증가하는 국민연금 추납.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추납 신청자는 매년 늘고 있다. 김상희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2014년 4만1165명에서 지난해 14만7254명으로 3.6배로 증가했다. 지난해 신청자 중 60세 이상이 절반(46.6%)을 차지한다. 50대는 41.5%에 달한다. 60세 이상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젊은 시절 노후준비 같은 데 신경 쓸 겨를없이 살아왔기 때문이다. 막상 은퇴에 닥치자 국민연금 최소가입기간(10년)이 안 돼 추납으로 구멍을 메운다. 물론 연금액을 늘리려는 사람도 있다.

추납제도의 취지는 연금액 늘리기보다 최소한의 연금액을 확보해주려는 것이다. 2016년 전업주부에게 추납을 확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너무 과도한 금액, 과도한 기간을 추후납부 하면서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지난해 추납한 사람의 11%인 1만6000명가량이10년치 넘게 추납했다. 20년치 넘는 사람도 536명이다. 최장기간 추납자는 24년 3개월이다. 어떤 사람은 1억800만원을 추납했다. 김상희 의원은 “국민연금 추후납부제도가 일부 가입자의 재테크 수단으로 전락했다. 대다수의 성실납부자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유럽연합(EU) 32개 회원국 중 17개국이 추납제도를 운영한다. 한국처럼 무제한 추납을 허용한 데는 없다. 오스트리아는 학업기간(최대 6년), 프랑스는 고등교육기간과 불완전 경력기간, 육아기 등만 허용한다. 독일도 학업과 양육기간(최대 5년)만 허용한다.

추납 후 연금 변화.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추납 후 연금 변화.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전문가들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다만 추납 허용 범위는 의견이 엇갈린다. 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은 “소득이 있을 때, 성실하게 보험료를 내는 게 원칙이다. 제도 도입 단계에서 제한적으로 넓게 허용할 수는 있지만 이걸 일반화해서 넓게 허용하는 것은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 전 이사장은 “자칫 돈 내고 돈 먹기로 비친다”며 “육아·학업 등의 불가피한 경우에만 추납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추납할 때 이자를 따져서 받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옛날에 얼마를 냈는지도 따지지 않는다. 원칙이 없다. 연금재정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양 교수는 “국민연금을 받으려면 10년 가입해야 한다. 이를 갖추는 데 도움이 되도록 10년까지만 추납을 허용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 추납제도를 악용하려 한 적도 있다. 2018년 이재명 경기도 지사와 김영록 전남지사가 만 18세 청년에게 한 달 치 국민연금 보험료를 도(道) 재정으로 내주려 했다. 추납하려면 한 번은 보험료를 내야 하고 그 이후 기간만 허용한다. 나중에 18세 보험료부터 추납할 수 있게 근거를 제공하려 했다. 제도를 악용한 포퓰리즘적 시도였고, 복지부·도의회 등의 반대에 부닥쳐 없던 일이 됐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