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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한입에 반해 홍콩 온 남자···반중투사로 30년 바쳤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의류 브랜드 지오다노의 창업주로 잘 알려진 지미 라이(黎智英)가 10일 새벽 홍콩 호만틴(何文田)에 위치한 자택에서 홍콩보안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체포되면서 30여 년에 걸친 그의 반중(反中) 행보가 멈출지 관심이다.

10일 새벽 홍콩보안법 위반 혐의로 #두 아들과 함께 전격 체포된 지미 라이 #의류업체 기업인으로 큰 돈 벌었지만 #1989년 천안문사태 후 반중활동 시작 #리펑 총리 욕하는 공개 서한도 발표 #홍콩 민주화 운동에 자금줄 역할 #“중국인임이 자랑스럽고 조국 사랑한다” #“불행한 건 조국을 사악한 공산당이 통치”

홍콩 민주화 운동의 큰 축인 지오다노 창업주 지미 라이가 10일 새벽 홍콩 자택에서 전격 체포됐다. 혐의는 외국 세력과 결탁해 홍콩보안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사진은 과거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홍콩의 미래를 걱정하며 눈물을 보인 지미 라이. [로이터=연합뉴스]

홍콩 민주화 운동의 큰 축인 지오다노 창업주 지미 라이가 10일 새벽 홍콩 자택에서 전격 체포됐다. 혐의는 외국 세력과 결탁해 홍콩보안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사진은 과거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홍콩의 미래를 걱정하며 눈물을 보인 지미 라이. [로이터=연합뉴스]

지미라이는 중국 공산당이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기 직전인 1948년 12월 8일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에서 태어났다. 그가 일곱 살이 됐을 때 아버지는 홍콩으로 떠났고 어머니는 노동개조를 받는 신세였다.

위로 두 누나와 형은 다른 지방으로 떠났고 집엔 그와 쌍둥이 여동생, 그리고 지적 장애가 있는 누나가 어머니와 함께 남았다. 집안의 이런저런 물건을 팔아 간신히 입에 풀칠하는 처지여서 지미는 일찍부터 돈을 벌어야 했다.

지난 30여 년간 반중 행보를 걸어온 지미 라이가 10일 새벽 홍콩 자택에서 체포돼 집밖으로 나서고 있다. [중국 앙스신문 캡처]

지난 30여 년간 반중 행보를 걸어온 지미 라이가 10일 새벽 홍콩 자택에서 체포돼 집밖으로 나서고 있다. [중국 앙스신문 캡처]

기차역에서 짐을 나르고 품삯을 받다 12세 때 홍콩 돈 1달러를 달랑 몸에 지니고 마카오를 거쳐 홍콩으로 밀항했다. 초콜릿이 원인이었다. 한 번은 기차역에서 홍콩 손님의 짐을 날랐는데 그가 돈 대신 초콜릿을 줬다.

본 적도 맛본 적도 없는 걸 입에 넣는 순간 천하에 이런 맛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홍콩사람이고 초콜릿은 홍콩에서 왔으니 홍콩은 반드시 인간 천당(天堂)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그는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중국 언론은 홍콩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지미 라이가 체포되자 마침내 그가 수갑을 차게 됐다며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중국 앙스신문 캡처]

중국 언론은 홍콩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지미 라이가 체포되자 마침내 그가 수갑을 차게 됐다며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중국 앙스신문 캡처]

1960년 홍콩으로 밀항한 그는 당시 한 달에 3달러를 받으며 밀입국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16세가 됐을 때는 가발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나름대로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창업을 결심했다.

어릴 적 외할머니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한다. 할머니는 무얼 팔건 ‘라오반(老板, 주인)’이 돼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지오다노 창업 후 성공적인 기업인의 삶을 살던 그를 반중 투사로 만든 건 89년 6.4 천안문(天安門) 사태였다.

홍콩 경찰 약 200여 명이 10일 지미 라이 소유의 빈과일보 사옥에 들이닥쳐 임원을 체포하고 압수 수색을 벌였다. 반중 언론에 대한 ‘재갈 물리기’라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 앙스신문 캡처]

홍콩 경찰 약 200여 명이 10일 지미 라이 소유의 빈과일보 사옥에 들이닥쳐 임원을 체포하고 압수 수색을 벌였다. 반중 언론에 대한 ‘재갈 물리기’라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 앙스신문 캡처]

중국 공산당 정부의 무자비한 민주화 운동 진압에 그는 격분했다. 지오다노의 티셔츠에 “내려오라! 우리는 분노했다!”와 같은 구호를 적어 홍콩 시민에 나눠주고, 이들이 항의 시위를 할 때 입도록 했다. 중국 지도자의 퇴진을 요구한 것이다.

이듬해인 90년엔 본격적인 반중 의지 표출을 위해 매체 창간에 나섰다. 넥스트미디어그룹을 세워 ‘일주간(壹週刊)’ 발행에 나섰다. 그리고 여기에 ‘XXX 리펑(李鵬)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기도 했다.

중국 신화사가 지난해 8월 꼽은 ‘홍콩에 재난을 안기는 4인방’.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지미 라이, 변호사 출신 마틴 리, 입법회 의원 출신의 허쥔런, 홍콩 고위 공무원 출신의 천팡안성. [중국 바이두 캡처]

중국 신화사가 지난해 8월 꼽은 ‘홍콩에 재난을 안기는 4인방’.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지미 라이, 변호사 출신 마틴 리, 입법회 의원 출신의 허쥔런, 홍콩 고위 공무원 출신의 천팡안성. [중국 바이두 캡처]

천안문 사태 무력 진압에 책임이 있다고 보는 리펑 총리를 향해 욕설을 넣어 공개 비판한 것이다. 그의 중국 내 지오다노 사업이 무사할 리 없었고 그 또한 중국 출입이 막혔다. 그러나 그는 95년 ‘빈과일보(頻果日報)’를 창간하며 중국 비판의 수위를 더 높였다.

중국 입장에선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 된 셈이다. 중국 관영 신화사(新華社)는 1년 전인 지난해 8월 ‘홍콩에 재난을 안기는 4대 인물’이라는 보도에서 지미라이를 첫 번째 인물로 꼽았다.

중국에선 지미 라이를 ‘민족의 변절자(民族敗類)’라고 비난하고 있다. 중국에 반대하고 홍콩을 어지럽히며 반역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바이두 캡처]

중국에선 지미 라이를 ‘민족의 변절자(民族敗類)’라고 비난하고 있다. 중국에 반대하고 홍콩을 어지럽히며 반역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바이두 캡처]

매체를 이용해 중국 성토에 앞장서는 한편 홍콩 민주화 세력에 자금을 공급하는 역할을 그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홍콩의 민주당과 공민당, 천주교 홍콩교구 등에 꾸준하게 성금을 내 왔다.

2009년의 경우 비회원으로부터 민주당이 모금한 전체 액수의 99%를 그가 부담한 것으로 알려진다. 2014년 홍콩에서 우산 혁명이 벌어졌을 때 그가 지원한 돈이 무려 5000만 홍콩달러(약 76억원)에 달한다고 중국 인민일보는 주장하기도 했다.

지난해 8월 홍콩의 송환법 반대 시위에 함께 한 지미 라이(가운데)가 두 손을 맞잡고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 [유상철 기자]

지난해 8월 홍콩의 송환법 반대 시위에 함께 한 지미 라이(가운데)가 두 손을 맞잡고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 [유상철 기자]

지미라이는 올해 72세이지만 민주화 운동의 배후에서만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다. 지난해 송환법 반대 시위 현장에서도 늘 선두에 서 있었다. 따라서 홍콩보안법이 지난 6월 30일 통과됐을 때 그를 체포하는 건 사실상 시간문제로 여겨져 왔다.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그를 그대로 둘 리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언론은 현재 수갑 찬 그의 모습 보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의 아들 둘과 넥스트미디어그룹 직원들도 함께 체포했다고 의기양양한 모습이다.

1948년 중국 광둥성에서 태어난 지미 라이는 12세 때 홍콩으로 밀항해 의류업체 지오다노로 성공했다. 그러나 89년 중국의 천안문 사태 무력 진압을 계기로 반중 인사로 돌아서 지금까지 30년 넘게 중국 공산당 비판에 앞장서 왔다. [중국 바이두 캡처]

1948년 중국 광둥성에서 태어난 지미 라이는 12세 때 홍콩으로 밀항해 의류업체 지오다노로 성공했다. 그러나 89년 중국의 천안문 사태 무력 진압을 계기로 반중 인사로 돌아서 지금까지 30년 넘게 중국 공산당 비판에 앞장서 왔다. [중국 바이두 캡처]

홍콩보안법이 통과됐을 때 지미라이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내가 중국인임이 자랑스럽고 내 조국을 사랑한다. 불행한 건 내 조국이 중국공산당이란 사악한 정권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체포로 그의 반중 행보가 꺾일지는 미지수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you.sangch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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