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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천박한 도시의 시민을 위한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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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말이 까칠하기로 정평이 난 정치인이다. “옳은 말을 해도 꼭 귀에 거슬리게 한다”는 평가는 직설 화법을 무기로 독재와 싸우던 민주화 운동 시절부터 몸에 밴 것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화법으로 인해 뜻하지 않은 구설에 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이다. “도시가 왜 이렇게 초라할까”라고 해 부산시민의 자존심을 건드린 발언이 그랬다. “머라꼬?” 부산 사람들이 일제히 터뜨린 이 세 글자에 지역균형발전이 신념이라는 집권당 대표의 총선 공약은 묻혀 버렸다. 아마도 이 대표는 “경부선 도심 구간 지하화 현안을 해결해 드리겠다”는 공약을 좀 더 ‘임팩트’ 있게 전달하려는 의도였던 듯하다.

좋은 집에 살고 싶은 시민의 꿈을 #천박하다고 비판할 수 있나 #인지상정 부정하는 정책은 위선

그러나 ‘천박한 서울’ 발언에 대해서는 굳이 선한 의도를 유추해 가며 변호할 생각이 없다. “맥락을 생략해 진의를 왜곡했다”는 반박에 따라 앞뒤 말을 다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천박한’이란 형용사를 사용한 배경이 됐을 이 대표의 발상과 관점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비교 대상 선택부터 잘못됐다. 센강의 문화유산과 한강의 아파트를 비교하며 ‘천박’의 낙인을 찍은 건 공정한 비교가 아니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범주오류(category mistake)다. 서울에도 조선왕조 500년의 얼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문화유산이 많다. 다만 그 위치가 한강이 아닐 뿐이다. 당시의 한강은 서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대표가 센강 유람선에서 파리의 품격을 칭송하듯 외국인들은 경복궁, 창경궁에서 북촌, 서촌을 거쳐 재래시장, 뒷골목까지 누비며 서울의 매력에 젖는다. 한양 도성의 센강이었을 청계천 변을 거닐며 천박하다고 하는 외국인은 아직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서울의 아파트를 천박하다고 한 건 온당한 표현일까. 이 대표의 발언은 성냥갑 아파트를 건축적·미학적 관점에서 비판한 게 아니라 아파트 위치와 평당 가격이 그곳에 사는 사람의 값어치를 대변하는 듯한 현실을 지적한 말일 것이다. 어느 순간 우리 사회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어디 사세요”라고 묻기 민망한 사회가 돼버렸다. “당신 재산이 얼마요”라고 묻는 무례함과 같기 때문이다. 사는 곳이 곧 경제력, 나아가 사회적 지위, 더 나아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척도처럼 통하게 된 게 서울살이의 한 단면이다. 아마도 이 대표의 눈에 서울은 삶의 질이나 자기 성취보다 아파트 시세에 더 집착하는 ‘물신숭배자’들의 집합소쯤으로 보인 듯하다.

그런 측면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책임 있는 정치 지도자라면 유권자들을 싸그리 속물로 폄하할 게 아니라 관점을 달리해 생각해야 한다. 주택 가격이 지역과 형태, 주변 환경에 따라 천양지차로 나뉘는 건 서울뿐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대도시에서 예외 없는 현상이다. 이 대표가 비교 대상으로 든 파리도 그 정도가 더하면 더했지 서울보다 못하지 않다고 한다. 서울만 콕 집어 천박하다고 하는 건 지나친 자학 아닌가.

무주택자에겐 나만의 집을 갖고 싶은 욕망이 있다. 집을 갖고 나면 더 좋은 집, 더 좋은 동네에 살고 싶은 욕망이 생겨난다. 결코 ‘고귀하다’거나 ‘품위 있다’고 미화할 순 없지만, ‘천박하다’고 비난할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다. 누구나 갖는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청와대 참모진 역시 똑같은 욕망의 소유자임을 그들의 부동산 리스트가 보여준다.

정치의 역할은 좋은 집에 살려는 꿈을 최대한 많은 사람이 실현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이다. 꿈을 실현코자 하는 각자의 노력을 발전의 에너지로 승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욕망과 욕망의 충돌을 조화롭게 조정하는 것 또한 정치의 몫이다. 이 모든 것에 깔린 대전제는 욕망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인지상정을 인정하지 않는 정책은 위선이고, 욕망을 인위적으로 억제하는 정책은 시장과 맞서는 결과를 초래한다. 지금 집권당의 부동산 정책이 그런 발상의 바탕 위에서 세워지고 있는 건 아닌지, 천박한 도시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의심하고 있다.

예영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