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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반발에 근로계약서 못 쓰는 도로공사 직고용…소송으로 날 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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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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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근로계약서는 근로조건을 명시한 문서다. 근로계약기간, 임금, 근로시간, 휴일, 연차유급휴가 등이 망라된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은 직원이 됐다(근로관계 성립)는 의미이기도 하다. 노동시장을 움직이는 가장 기초적인 행위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목적은 명확하다. 근로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아르바이트생도 근로계약서를 작성한다. 사업주의 전횡으로부터 문서상 안전지대를 확보하는 셈이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사업주에게 법으로 책임을 묻는 것도 그래서다.

직무 사라졌는데 직고용 판결 #억지로 청소형 직무 만들어 배치 #노조, 근로계약 거부로 인사 혼란 #갈등 재생산에 툭하면 법원 갈 판

한데 근로계약서를 근로자가 외면하는 희한한 곳이 있다. 법의 취지와 정반대 현상이다. 그것도 공기업에서다. 한국도로공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지난해 8월 대법원 판결로 도로공사에 직고용된 고속도로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얘기다. 1413명이다.

지난해 도로공사에 직고용된 고속도로 요금수납원이 영업소 주변을 청소하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해 도로공사에 직고용된 고속도로 요금수납원이 영업소 주변을 청소하고 있다. [중앙포토]

문제는 이들이 원래 수행하던 직무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요금수납 업무가 자회사인 한국도로공사서비스㈜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기존 수납원 대부분(5101명)은 자회사 정규직으로 편입됐다. 도로공사로선 “할 일 없는 직원 1400명이 갑자기 생긴 꼴”(도로공사 관계자)이다. 그렇다고 일도 시키지 않고 임금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쩔 수 없이 없는 일감이라도 찾아야 하는, 꼼수를 써야 하는 지경에 몰린 셈이다. 국민 세금을 쓰는 공기업으로서 체면이나 책임감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게 ‘현장지원직’이란 이름의 직무가 탄생했다. 이 직무에 배정된 업무는 졸음 쉼터나 정류장, 고속도로 옆 경사면, 휴게소나 청사 주변, 교량 밑, 배수로 등에 대한 청소다. 기존 도로관리원들이 도로 보수 공사 등을 하면서 1년에 한두 차례 비정기적으로 해왔던 업무다.

전형석 인력처 노무후생팀장은 “꼭 필요한 업무라고 보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궁여지책으로 업무를 쪼갰다는 얘기다. 따지고 보면 도로공사 입장에선 예기치 못한 잉여인력에 따른 인건비 누수고, 국민 입장에선 세금이 허투루 쓰이는 꼴이다. 전 팀장은 “1400명을 놀릴 수는 없고, 갑자기 맡길 업무를 새로 만들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도로공사 직고용 톨게이트 직원과 자회사 직원의 업무·처우 비교. 그래픽=신재민 기자

도로공사 직고용 톨게이트 직원과 자회사 직원의 업무·처우 비교. 그래픽=신재민 기자

임금을 어떻게 책정할지도 고민거리였다. 도로공사는 지난해 9월 이들의 보수체계를 새로 만들었다. 해가 바뀌면 자동으로 임금이 오르는 호봉제였다. 초임은 4호봉으로 책정됐다. 평균 연봉이 3181만5000원이다. 추가로 건설수당, 성과급, 정근보조비는 물론 복리후생도 기존 직원과 같은 수준으로 지급한다.

도로공사는 이런 임금체계에다 근로시간, 휴무·휴가, 퇴직급여 등의 내용을 넣은 근로계약서를 만들어 근로자에게 건넸다. 하지만 단 한명도 근로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다(6월 30일 기준). 현장지원 직무 대신 이미 자회사로 넘어가 사라진 요금수납 업무를 맡겨달라고 요구하면서다. 임금도 “기존 도로관리원과 15% 차이가 난다”며 더 올려달라는 입장이다.

전 팀장은 “도로관리원은 고속도로를 차단하고 도로를 복구하는 등 위험한 본선 관리 업무를 한다”며 “난이도와 책임 등에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청소하는 직종과 위험한 도로관리업무의 임금을 동등하게 하면 기존 직원의 반발도 우려된다는 게 도로공사 측의 입장이다.

도로공사 직고용 톨게이트 직원과 자회사 직원의 업무·처우 비교. 그래픽=신재민 기자

도로공사 직고용 톨게이트 직원과 자회사 직원의 업무·처우 비교. 그래픽=신재민 기자

김철희 한국경영자총협회 노사관계지원팀장은 “파견법상 직고용을 하게 되면 임금을 비롯한 근로조건이 파견 당시보다 저하되지 않으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즉 톨게이트 요금수납원으로 근무할 당시 연봉 2617만원보다 적게 주지만 않으면 된다는 의미다. 도로공사가 예전보다 22%나 인상한 임금을 제시한 것은 자회사 정규직과의 형평성을 감안한 조치였다.

유경준 의원(미래통합당)은 “근로계약서가 없다는 것은 근로조건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분쟁 예방은 고사하고 분쟁이 발생할 경우 근로조건에 대한 객관적 입증이 불가능하다. 결국 분쟁만 생기면 법원으로 달려가는 수순을 밟게 된다. 노사 간 자율과 신뢰는 공염불이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직고용된 요금수납원이 속한 노조는 올해 2월 도로공사를 상대로 임금차액 소송을 제기했다. “도로관리원 임금과 같은 수준으로 달라”는 취지다. 직고용한 뒤 오히려 소송에 휘말려 노사 간 갈등의 골만 깊어지고 있는 셈이다. 근로계약서가 없는 상태에선 추후 어떤 소송이 돌출할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근로계약서 없이는 직무조정도 어렵다. 도로공사는 공사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업무를 이들에게 맡길 방안을 강구 중이다. 이원욱 미래전략처 차장은 “주차장과 임시 휴게소 관리, 직영 주유소 운영·관리 등의 업무를 발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비록 억지로 만든 서비스 업무지만 이마저도 근로계약서를 작성해야 진행할 수 있다. 도로공사의 경영·인사상 혼란은 불가피하다.

이 와중에 자회사는 인력 부족으로 올해 725명을 공개경쟁방식으로 추가 채용했다. 5.7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유경준 의원은 “직고용된 인력이 자회사 정규직으로 전환됐다면 자회사의 추가 채용에 따른 인건비, 연 236억원의 혈세 낭비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