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이 임기 만료로 퇴임 예정인 권순일 대법관의 후임으로 이흥구(57‧사법연수원 22기)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임명해 달라고 문재인 대통령에 제청했다. 이 부장판사는 '국가보안법 위반 1호 사법시험 합격자'로, 그가 대법관이 된다면 국보법 위반 사범이 법원 최고직을 맡는 전무후무한 사례가 된다.
‘민추위’ 사건으로 국보법 유죄…1심 판사는 권순일
이 부장판사는 서울대 법대 82학번으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원희룡 제주지사, 나경원 전 의원과 동문이다. 조 전 장관은 자신의 자서전『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에서 이 부장판사를 “정의감이 남달리 투철한 동기로,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에 가입해 활동했다는 이유로 1년 6개월을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표현했다.
이 부장판사는 서울대 학생운동의 비공개 지도조직인 민추위 구성원으로 활동하면서 1985년 6월 의류제조업체 대우어패럴 노조를 중심으로 한 구로 동맹 파업에 지원 시위를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학내홍보와 선전을 맡아 파업농성을 지원하자는 전단을 배포했고, ‘독재 타도’ 구호를 새겨 넣은 머리띠와 방어용 각목 등을 준비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 부장판사에게 국보법 유죄 판결을 받을 당시 주심이 권 대법관이다. 안문태 현 법무법인 양헌 고문변호사와 이동명 법무법인 처음 대표변호사, 권 대법관으로 이뤄진 서울형사지방법원 14합의부는 1986년 이 부장판사에게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이 부장판사가 몇 차례에 걸쳐 반성문을 제출했고, 건강이 좋지 않은 점을 고려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으로 감형했다. 2심에서 형은 확정됐다. 이후 이 부장판사는 사법시험에 도전해 국보법 위반자 중 최초 합격자가 됐다.
경찰청 과거사진상위원회는 2005년 민추위 사건에 대공경찰의 고문에 의한 사건 과장과 조작 시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민주화운동의 기세를 꺾기 위해 국보법을 확대 적용한 기획수사였다는 것이다. 이 부장판사와 함께 구속됐던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은 2014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주요 판결은 ‘보도연맹 사형 판결’ 첫 재심 결정
이 부장판사는 판사가 된 후에도 진보적 색채를 드러내 왔다. 주요 판결은 재심 사건이다. 이 부장판사는 2014년 한국전쟁 때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군사재판을 받고 사형당한 이들의 유족이 낸 재심 청구를 최초로 받아들였다. 경남 마산지역 보도연맹원 400여명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헌병과 경찰의 통보를 받고 마산 시내 한 극장에 모였다가 모두 영장 없이 체포됐다. 이들 가운데 141명은 이적죄가 적용돼 그해 8월 사형이 집행됐다.
이 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숨진 피고인들은 영장 없이 불법적으로 체포‧감금됐고, 수사 과정에서 고문 등 가혹 행위를 당했으며 민간인임에도 군법회의에 회부돼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됐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 전쟁이라는 전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 때문에 많은 고심을 했으나 현 시점에서 제대로 된 재판을 받도록 해보자는 뜻에서 재심 결정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 부장판사는 1995년 김일성 전기 판매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해 안기부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안기부는 당시 ‘문제 성향 판사의 형사부 보직 배제 필요’ 보고서에서 이 부장판사의 전보인사 필요성을 거론했다.
김명수 대법원장 된 뒤 승진…‘우리법’ 인연
이 부장판사는 법원 내 진보성향 법관들의 모임인 ‘우리법 연구회’ 출신이다. 김 대법원장이 회장을 지낸 ‘국제인권법연구회’에 몸담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부장판사는 2018년 김명수 코트에서 단행한 첫 고위법관 정기인사에서 고법부장 판사로 승진했다. 연수원 동기들이 2015년 처음으로 고법부장 판사가된 지 3년 뒤의 일이었다. 김 대법원장은 2019년 10월에는 법원 내 주요 보직으로 불리는 사법행정자문회의 재판제도 분과위원장에 이 부장판사를 임명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대법관 후보가 3명으로 줄어들었을 때부터 이 부장판사가 대법관 후보로 제청되리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부산에서만 27년 근무…현재는 무주택자
이 부장판사는 약 27년 동안 부산 지역에만 근무했던 판사로 서울에서 주로 근무했던 판사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의 부인 역시 판사로, 김문희(55‧25기) 부산지법 서부지원장이다. 김 대법원장은 “오랜 기간 부산 지역에서 근무하면서 충실하고 공정한 재판으로 법원 내부는 물론 지역 법조사회에서도 신망을 받고 있다”고 이 부장판사를 소개했다.
지난 3월 공개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약 11억7800만원이다. 그와 부인의 예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부동산으로는 이 부장판사 소유의 부산 해운대구 아파트가 있었지만 팔았다. 현재는 부인이 서울 마포구 아파트를 약 5억5000만 원대의 전세로 보유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김 대법원장의 임명제청을 받아들여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면 이 부장판사는 인사청문회를 거치게 된다. 이후 본회의 인준 표결을 거치면 새 대법관으로 임명된다.
이가영 기자 lee.gayoung1@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