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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일 대법관 후임에 그가 국보법 유죄 판결한 이흥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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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대법원장이 10일 권순일 대법관의 후임으로 이흥구(57?사법연수원 22기)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임명해 달라고 문재인 대통령에 제청했다. [사진 대법원]

김명수 대법원장이 10일 권순일 대법관의 후임으로 이흥구(57?사법연수원 22기)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임명해 달라고 문재인 대통령에 제청했다. [사진 대법원]

김명수 대법원장이 임기 만료로 퇴임 예정인 권순일 대법관의 후임으로 이흥구(57‧사법연수원 22기)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임명해 달라고 문재인 대통령에 제청했다. 이 부장판사는 '국가보안법 위반 1호 사법시험 합격자'로, 그가 대법관이 된다면 국보법 위반 사범이 법원 최고직을 맡는 전무후무한 사례가 된다.

‘민추위’ 사건으로 국보법 유죄…1심 판사는 권순일

이흥구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사법고시 합격 당시 모습. [중앙포토]

이흥구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사법고시 합격 당시 모습. [중앙포토]

이 부장판사는 서울대 법대 82학번으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원희룡 제주지사, 나경원 전 의원과 동문이다. 조 전 장관은 자신의 자서전『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에서 이 부장판사를 “정의감이 남달리 투철한 동기로,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에 가입해 활동했다는 이유로 1년 6개월을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표현했다.

이 부장판사는 서울대 학생운동의 비공개 지도조직인 민추위 구성원으로 활동하면서 1985년 6월 의류제조업체 대우어패럴 노조를 중심으로 한 구로 동맹 파업에 지원 시위를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학내홍보와 선전을 맡아 파업농성을 지원하자는 전단을 배포했고, ‘독재 타도’ 구호를 새겨 넣은 머리띠와 방어용 각목 등을 준비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 부장판사에게 국보법 유죄 판결을 받을 당시 주심이 권 대법관이다. 안문태 현 법무법인 양헌 고문변호사와 이동명 법무법인 처음 대표변호사, 권 대법관으로 이뤄진 서울형사지방법원 14합의부는 1986년 이 부장판사에게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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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심 재판부는 이 부장판사가 몇 차례에 걸쳐 반성문을 제출했고, 건강이 좋지 않은 점을 고려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으로 감형했다. 2심에서 형은 확정됐다. 이후 이 부장판사는 사법시험에 도전해 국보법 위반자 중 최초 합격자가 됐다.

경찰청 과거사진상위원회는 2005년 민추위 사건에 대공경찰의 고문에 의한 사건 과장과 조작 시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민주화운동의 기세를 꺾기 위해 국보법을 확대 적용한 기획수사였다는 것이다. 이 부장판사와 함께 구속됐던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은 2014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주요 판결은 ‘보도연맹 사형 판결’ 첫 재심 결정

노치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경남유족회장(마이크를 들고 있는 사람) 등 유족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2월 14일 창원지법 마산지원에서 한국전쟁 때 숨진 보도연맹원 6명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된 후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치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경남유족회장(마이크를 들고 있는 사람) 등 유족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2월 14일 창원지법 마산지원에서 한국전쟁 때 숨진 보도연맹원 6명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된 후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부장판사는 판사가 된 후에도 진보적 색채를 드러내 왔다. 주요 판결은 재심 사건이다. 이 부장판사는 2014년 한국전쟁 때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군사재판을 받고 사형당한 이들의 유족이 낸 재심 청구를 최초로 받아들였다. 경남 마산지역 보도연맹원 400여명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헌병과 경찰의 통보를 받고 마산 시내 한 극장에 모였다가 모두 영장 없이 체포됐다. 이들 가운데 141명은 이적죄가 적용돼 그해 8월 사형이 집행됐다.

이 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숨진 피고인들은 영장 없이 불법적으로 체포‧감금됐고, 수사 과정에서 고문 등 가혹 행위를 당했으며 민간인임에도 군법회의에 회부돼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됐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 전쟁이라는 전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 때문에 많은 고심을 했으나 현 시점에서 제대로 된 재판을 받도록 해보자는 뜻에서 재심 결정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 부장판사는 1995년 김일성 전기 판매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해 안기부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안기부는 당시 ‘문제 성향 판사의 형사부 보직 배제 필요’ 보고서에서 이 부장판사의 전보인사 필요성을 거론했다.

김명수 대법원장 된 뒤 승진…‘우리법’ 인연
이 부장판사는 법원 내 진보성향 법관들의 모임인 ‘우리법 연구회’ 출신이다. 김 대법원장이 회장을 지낸 ‘국제인권법연구회’에 몸담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부장판사는 2018년 김명수 코트에서 단행한 첫 고위법관 정기인사에서 고법부장 판사로 승진했다. 연수원 동기들이 2015년 처음으로 고법부장 판사가된 지 3년 뒤의 일이었다. 김 대법원장은 2019년 10월에는 법원 내 주요 보직으로 불리는 사법행정자문회의 재판제도 분과위원장에 이 부장판사를 임명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대법관 후보가 3명으로 줄어들었을 때부터 이 부장판사가 대법관 후보로 제청되리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부산에서만 27년 근무…현재는 무주택자

이 부장판사는 약 27년 동안 부산 지역에만 근무했던 판사로 서울에서 주로 근무했던 판사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의 부인 역시 판사로, 김문희(55‧25기) 부산지법 서부지원장이다. 김 대법원장은 “오랜 기간 부산 지역에서 근무하면서 충실하고 공정한 재판으로 법원 내부는 물론 지역 법조사회에서도 신망을 받고 있다”고 이 부장판사를 소개했다.

지난 3월 공개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약 11억7800만원이다. 그와 부인의 예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부동산으로는 이 부장판사 소유의 부산 해운대구 아파트가 있었지만 팔았다. 현재는 부인이 서울 마포구 아파트를 약 5억5000만 원대의 전세로 보유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김 대법원장의 임명제청을 받아들여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면 이 부장판사는 인사청문회를 거치게 된다. 이후 본회의 인준 표결을 거치면 새 대법관으로 임명된다.

이가영 기자 lee.g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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