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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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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재활용 쓰레기장 옆에 음식물 쓰레기통이 줄지어 있었다. 여름이 되니 냄새가 심했고 모기와 파리가 들끓었다. 음식 쓰레기를 버리고 뒤돌아서니 더운 바람이 불었다. 좀 전까지 울어대던 매미 소리가 뚝 끊기고, 갑자기 사위가 고요했다. 이 길로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다. 멀리가 아니어도 좋으니, 그저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단 일주일만이라도, 아니, 단 하루만이라도 청소와 빨래와 밥 준비와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하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김이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최근 문화계 키워드 중 하나가 ‘K장녀’다. ‘K장녀’ 소재의 드라마·영화들이 이어진다. 남자 형제들을 위해 희생하며 ‘장녀’란 이름의 차별을 기꺼이 감수하는, 한국적 가족문화의 상징이다. 특히 비혼의 장녀일수록 심하다. 전통적으로 ‘장남’ ‘맏며느리’에게 주어졌던 책임을 나눠 가지면서, 노부모 수발 등 돌봄 노동을 떠안는다.

김이설 소설의 주인공도 비혼의 40대 장녀다. 시인을 꿈꾸는 그는 부모를 모시고, 이혼한 여동생의 아이들 돌보기까지 돌봄 노동을 도맡는다. 장녀니까, 결혼을 안 했으니까, 시인 지망에 마땅히 직업도 없으니까 가사 노동은 전적으로 그의 몫이다. 가사노동의 단조로움보다, 그것이 ‘집에서 놀고먹는’ 상태로 치부되는 게 더 그를 숨 막히게 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잘한 가사노동의 행렬을 묘사한 몇장을 넘길 때면 절로 숨이 막혀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필사적으로 시를 필사하던 그는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간다.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