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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론의 공주’ 허세음아, 왕성했던 15세기 바닷길 증언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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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8호 26면

[중국 기행 - 변방의 인문학] 취안저우

정화의 출생지인 쿤밍에 조성된 정화공원의 정화상. 석상 전면으로 멀리 보이는 호수가 뎬츠다. 정화는 명나라의 대항해가라는 명성을 갖고 있지만 신상을 들여다보면 항해가와는 꽤나 다르게 느껴진다. 출생지는 해안이 아닌 서남 내륙이고, 신분은 무관이 아닌 환관이었고, 종교는 이슬람이었다. [사진 윤태옥]

정화의 출생지인 쿤밍에 조성된 정화공원의 정화상. 석상 전면으로 멀리 보이는 호수가 뎬츠다. 정화는 명나라의 대항해가라는 명성을 갖고 있지만 신상을 들여다보면 항해가와는 꽤나 다르게 느껴진다. 출생지는 해안이 아닌 서남 내륙이고, 신분은 무관이 아닌 환관이었고, 종교는 이슬람이었다. [사진 윤태옥]

취안저우(泉州)는 중국 푸젠성의 항구다. 한국인들의 여행 리스트에서는 낯선 도시이겠지만, 반걸음만 들어가면 귀를 쫑긋할 바다의 역사가 수북하다.

스리랑카 옛 왕조 실론국 후손 존재 #이슬람 사원, 불교 사찰 천년 ‘훌쩍’ #국제무역 관장 ‘시박사’ 유적지까지 #명나라 우월한 역량 스스로 포기 #정화 대함대 항해의 결말 미스터리

중국에 현존하는 이슬람 사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취안저우 청정사(淸淨寺)라는 사실은 다소 의아하게 들릴 수 있다. 청정사는 1009년 북송 시대에 창건됐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이슬람이라고 하면 신장이나 위구르를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그것은 이슬람 전래 역사의 반쪽에 지나지 않는다. 신장은 유라시아 교역로로 서쪽과 연결되지만 취안저우는 바닷길로 오가던 곳이다. 이슬람만이 아니고 불교 역시 바닷길로 오갔다. 취안저우의 불교 사찰 개원사(開元寺)는 686년 당대에 세워졌으니 1300년이 넘은 역사를 품고 있다.

실론 왕자 후손 묻힌 ‘세가갱’ 묘지 발견

취안저우를 발판으로 전개됐던 바다의 역사를 일깨워 주는 ‘지금 살아 있는’ 역사 인물도 있다. 바로 ‘실론의 공주’다. 지금의 스리랑카(1972년 실론에서 변경한 국호)가 아닌 전통시대 실론의 공주이다. 명사(明史)에는 세리파교랄야(世利巴交剌惹)라는 실론의 왕자가 1459년 명나라에 입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입조 후의 사정은 취안저우부지(泉州府志)에 기록돼 있다. 왕자가 취안저우에서 귀국선을 타려는데 깜짝 놀랄 소식이 전해져 왔다. 본국에서 사촌이 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는 것이다. 왕자는 고심 끝에 취안저우에 눌러앉았다.

중국 취안저우에 있는 ‘실론의 왕자’ 후손의 묘비 가운데 하나. 윗부분에 실론(錫蘭)이라는 자신들의 먼 고향을 선명하게 새겼다. [사진 윤태옥]

중국 취안저우에 있는 ‘실론의 왕자’ 후손의 묘비 가운데 하나. 윗부분에 실론(錫蘭)이라는 자신들의 먼 고향을 선명하게 새겼다. [사진 윤태옥]

실론 왕자는 자기 이름의 한자 표기 첫 글자 세(世)를 중국식 단성으로 삼았다. 500여 년이 흐른 20세기 후반 취안저우에서 왕자 후손들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러나 생존해 있는 후손을 찾지는 못했다. 여기까지는 1986년 스리랑카 의회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왕자의 ‘실종된 후손’을 찾아달라고 부탁해서 진행된 것이다. 그런데 1996년 취안저우의 한 야산에서 세가갱(世家坑)이라는 표지와 수십 기의 묘가 발견됐다. 비명의 망자는 모두 세(世)씨였고 사신이라는 말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입구의 사자 석상도 15세기 실론의 양식이었다. 바로 실론 왕자의 후손들이었던 것이다. 묘지를 발견한 후 2년 뒤에 지방정부는 묘지를 철거하고 신도시로 개발하려고 했다.

이에 취안저우 신문은 역사유적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비판하는 기사를 냈다. 이로 인해 세가갱이란 묘지가 지역사회에 널리 알려졌고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비판 기사가 나간 다음날 신문사에 전화 한 통이 걸려온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허세음아(許世吟娥, 현대 중국어 표기로는 쉬스인어, 1975년 출생)였다. 묘지에 묻힌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들이라고 했다.

2002년 중국과 우호적이던 스리랑카 정부는 그녀를 ‘실론의 공주’라고 칭하며 조상의 나라로 초청했다. 허세음아는 중국과 스리랑카 우호를 상징하는 민간인으로 유명해졌다. 세가갱은 개발에 훼손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론 교민 묘구’라는 표지가 세워져 역사유적지로 보호받고 있다.

취안저우에서 실론까지는 짧게 잡아도 바닷길 6000~7000㎞이다. 우리나라 서해안까지의 거리에 비해 5~6배나 된다. 15세기 조선이 새로운 왕조 세우기에 분투하고 있을 때 서남의 먼바다에서는 나의 상상을 넘어서는 해로를 오가면서 바다의 역사를 쌓아 오고 있었던 것이다. 삼면이 바다이면서 바다에 갇혀 있었던 조선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한·중·일 삼국이 동아시아 역사의 전부인 듯 착각하고 살아온 나에게, 남중국해가 동남아를 넘어 인도, 스리랑카까지 연결됐다는 것이 실감 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실론 공주’는 나의 좁은 시야와 둔한 거리 감각을 단숨에 뒤집어 주었다.

중국에 현존하는 이슬람 사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취안저우의 청정사. [사진 윤태옥]

중국에 현존하는 이슬람 사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취안저우의 청정사. [사진 윤태옥]

취안저우에서 음미하는 바다의 역사는 시박사(市舶使·市舶司)라는 키워드로도 비춰볼 수 있다. 시박사는 당송과 원명 시대에 국제무역을 관장하는 관직 또는 관아의 명칭이다. 취안저우는 남조(창강 이남에 있던 송-제-양-진 네 왕조) 시대부터 국제무역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당나라는 시박사를 두고 국제무역을 관리했는데 취안저우는 당시에 세 번째로 큰 항구였다. 당나라가 망하고 오대에 들어서는 해외무역을 중요한 세금원으로 인식할 정도로 무역이 발달했다.

송나라는 정책적으로 무역을 중시했다. 취안저우는 광저우에 이어 두 번째 큰 무역항으로 성장했다. 앞의 글에서 찾아갔던 저장성 닝보(당시에는 명주)를 넘어선 것이다. 1087년에는 푸젠의 시박사를 취안저우에 설치했다. 시박사 유적지는 지금도 남아 있다. 취안저우는 동남아와 인도 아랍의 40여개 항구와 거래를 하는 전성기를 맞았다. 남송 시대에는 전체 재정수입의 10%가 취안저우에서 나올 정도였다. 마르코 폴로는 취안저우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항구의 하나이고 많은 상인이 운집하고 화물은 산더미로 쌓여 있어 상상을 넘어선다고 기록했다.

송원 두 왕조는 유라시아 바닷길에서 출중한 해양국가였다. 활기가 넘쳤다. 취안저우의 이슬람사원 청정사와 몇 만에 달하는 이슬람 거주민들 그것을 말해 준다. 실론 왕자와 후손의 이야기도 이 항로에서 맺어진 스토리의 하나이다.

‘마르코폴로’ 세계 최대 무역항으로 기록

송대 취안저우에 설치된 시박사가 있던 곳의 표지. [사진 윤태옥]

송대 취안저우에 설치된 시박사가 있던 곳의 표지. [사진 윤태옥]

인도양의 동서 양쪽 끝까지 이어지는 가장 장쾌하고 멋진 항해는 명나라 초기에 있었던 정화의 대원정이었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지금의 푸젠성 오호문(푸저우)에서 출발해 아프리카 동부까지 오갔다. 당시 명나라 정화의 함대가 보유한 해양의 역량은 세계 최대이고 최강이었다. 길이로만 해도 최대 150m(70m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에 이르는 대형 선박 60여 척, 그에 따른 소형 선박도 100여 척, 승조인원 2만~3만 명의 대규모 선단이 총 18만5000㎞를 항해하며 남중국해에서 인도양 전역까지 누빈 것이다.

70년이 지난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 선단과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그렇다고 유럽의 함대처럼 불법무역 노예사냥이나 인명살상이 뒤섞인 반(半)해적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정화가 항해하던 당시의 인도양은 서로에게 열린 바다였고 공용의 통로였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러나 정화의 대원정은 출발도 그렇지만 결말도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세계 최강의 해양문화와 역량을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거둬들인 것이다. 항해의 기록마저 파기해 버렸다. 그리고는 도항과 사무역을 금지하는 해금(海禁) 체제로 돌아선 것이다.

근현대사를 서양이 바다를 장악하면서 동양을 압박하는 역사라고 요약한다면 아마도 그 변곡점은 정화의 항해가 아니었을까. 그때까지 우월했던 해양의 역량을 명나라는 왜 스스로 포기했을까. 조선이 망국하여 식민지가 되고 그것이 분단의 고통으로 이어진, 먼 이유의 하나는 명나라가 바다를 포기하면서 구축한 동아시아의 조공-공무역 국제질서라고 볼 수도 있다. 바다를 열린 창으로 삼으면 또 하나의 무한공간이요, 담으로 막으려 하면 막으려야 막을 수 없는 광대한 사막일 뿐이다. 그것을 여닫는 것은 한 시대의 선택이었지만 그 결과는 수백 년간 추락하는 역사의 환경이 되었던 것이다.

윤태옥 중국 여행객
중국에 머물거나 여행한 지 13년째다. 그동안 일년의 반은 중국 어딘가를 여행했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경계를 걷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엠넷 편성국장, 크림엔터테인먼트 사업총괄 등을 지냈다.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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