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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폭우가 삼킨 행궁, 100년 뒤 파보니 서양 램프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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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8호 16면

왕은 노심초사했다. 1879년 홍수를 겪자, 고종은 북한산성 행궁(行宮·전란 시 임금의 거처)과 공해(公廨·관가의 건물)의 안위를 물었다. 총융사 조희복이 고종에게 아뢴다.

촬영 시기가 1890~1900년대로 추정되는 북한산성 행궁의 모습. 이 사진은 주한미군으로 복무한 역사학자 로버트 네프가 수집했다. [사진 로버트 네프 컬렉션]

촬영 시기가 1890~1900년대로 추정되는 북한산성 행궁의 모습. 이 사진은 주한미군으로 복무한 역사학자 로버트 네프가 수집했다. [사진 로버트 네프 컬렉션]

“북한산성 각지의 공해는 올해 홍수 뒤 더욱 무너지고 새는 곳이 있는가 하면, 완전히 무너진 곳도 있습니다. 각 공해가 대부분 이와 같으니 몹시 걱정됩니다.” 왕이 하교하기를 “이곳은 바로 도성의 뒤 보루로서 기내(畿內·한양을 중심으로 한 행정구역)를 편안히 다스리게 하는 곳이라 소중함이 더욱 특별하니,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종실록 16권, 고종 16년 8월 29일)

성공회 주교 일행 빌려 쓴 피서지 #당시 사용했던 물품 일부로 추정 #1925년 을축년 ‘노아의 홍수’땐 #한강물 광화문 앞까지 들이닥쳐 #“산영루, 1935년 이후 유실설도” #북한산 7일 연속 전면 입산통제

하지만, 행궁을 비롯한 북한산성 여러 건물은 여러 차례의 큰비가 만든 충격에 골격이 틀어졌고, 물길에 쓸려 내려갔으며, 흙에 깔렸다. 1915년, 1925년 호우는 역사의 물줄기가 요동치는 속에서 민초를 억눌렀다. 북한산성에도 큰 재앙이었다.

# 1915년
북한산국립공원 사무소는 지난 6일까지 7일 연속 입산 통제를 했다. 지난달 31일부터 7일(오후 5시 기준)까지 북한산에 내린 비는 489㎜. 이명종 북한산국립공원 사무소 재난안전과 계장은 “만약 기상특보가 다시 발효돼 지속한다면 이번 주말은 물론 다음 주까지 입산 통제를 할 수 있다"며 “7일 연속 입산통제를 한 건 최근 10년간 처음”이라고 말했다.

8월의 첫 주말인 지난 1일, 서울 진관동 북한산성 입구에는 입산통제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수십 명의 등산객이 입구까지 왔다가 발길을 돌렸다. 이 계장은 “입산 통제는 무엇보다 탐방객의 안전을 위한 조치”라고 말했다.

비가 오면 산에서 실족의 위험이 커진다. 지반이 약해져 토사가 허물어질 수 있다. 전국 곳곳에서 산사태 경보가 이어지고 있다. 북한산성의 70%가 자리 잡은 경기도는 지난 6일 산림 산사태 심각 단계를 발령했다.

하늘에서 찍은 행궁 터. 행궁은 발굴 작업 뒤 현재 6차 정비 중이다. [사진 경기문화재단]

하늘에서 찍은 행궁 터. 행궁은 발굴 작업 뒤 현재 6차 정비 중이다. [사진 경기문화재단]

100여 년 전, 129칸의 북한산성 행궁은 이런 산사태에 휩쓸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1712년 북한산성이 지어진 지 200년이 갓 지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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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7월 30일 자 매일신보는 북한산 헌병대의 전화가 불통이 될 정도로 엄청난 비가 내렸다고 전한다. ‘북한산하의 일촌 거의 전멸, 17명이 바위 아래에 참혹히 죽음’ 제목의 기사 내용은 이렇다. ‘북한산에 물이 났다는 소식은 24일 오전 11시경…대해의 해일과 같이 몰려드는 큰 소리와 함께 백운대와 그 부근의 산에 모였던 빗물이 일시에 왈칵…북한산에 거주하는 인민은 약 150인이요 호수가 42호인데, 15호가 흘러가 3분의 1은 잃어버려….’

이날 행궁 관리인 부부와 그 자녀들도 희생됐다. 대한성공회 관련자도 부상을 입었다. 성공회는 행궁을 수리한 뒤 1912년부터 10년간 빌려 쓰는 것으로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았다. 피서지로도 쓰였다.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의 정창진 요셉 부제는 "당시 트롤로프(한국명 조마가) 주교가 세인트 제임스 행사를 26일 행궁에서 열려고 했다"며 "행사 준비를 위해 성공회 사람을 북한산성에 올려보냈던 것"이라고 말했다. 조마가 주교는 26일 현장에 도착해 피해 상황을 살펴본 뒤 서신으로 알렸다. 이는 대한성공회 기관지인 모닝캄 146호(1915년 10월 발간)에 나와 있다. 이후 100년, 2012년부터 이어진 행궁 발굴 작업 중 서양의 램프와 주물 스토브가 나왔다. 경기문화재단은 성공회 일행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북한산성 행궁이 폭우로 유실 된 1915년 이후 100여 년 만의 발굴  작업 중 나온 서양식 램프. 당시 대한성공회 주마가 주교와 그 일행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경기문화재단]

북한산성 행궁이 폭우로 유실 된 1915년 이후 100여 년 만의 발굴 작업 중 나온 서양식 램프. 당시 대한성공회 주마가 주교와 그 일행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경기문화재단]

동장대도 1915년 집중호우에 무너졌다. 3개 장대 중 나머지 남장대·북장대는 19세기 말에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월간 영문지 ‘더 코리아 리뷰’(코리안 리퍼지토리의 후신)는 1903년 10월호에 북한산성 8경을 꼽았다. ‘▶노적봉의 저녁노을 ▶봉성암의 종소리 ▶동장대의 달빛 ▶나한봉의 구름 ▶상운암의 폭포수 ▶원효암의 낙조 ▶청하동의 스님바위 ▶산영루의 물 구경’이 그것이다. 이 중 건물은 동장대와 산영루다.'

# 1925년
산영루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쓸려 내려간 것으로 보인다. 을축년 대홍수는 한강 하류 하천설계 기준으로 활용될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다.
수주 변영로(1898~1961)는 『명정 40년』 속 ‘을축년 표류기’로 대홍수의 공포를 전했다. ‘말 아니 하여도 기억하는 분은 기억하려니와, 비라 하기로니 그때의 것 같은 줄기차고 기승스런 비는 드물었을 것이다. 기십 일을 연이어 주야의 별(別) 없이 온다든지 나리는 것이 아니라 바다와 하늘이 뒤집힌 듯 그냥 퍼붓는 것이었다. 사람마다 개벽을 생각하고 노아의 홍수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가톨릭의 고위 성직자)가 1911년 찍은 북한산성 내 산영루. 산영루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 됐다. 뒤의 능선에 1915년 집중호우로 무너진 동장대가 보인다. [사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가톨릭의 고위 성직자)가 1911년 찍은 북한산성 내 산영루. 산영루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 됐다. 뒤의 능선에 1915년 집중호우로 무너진 동장대가 보인다. [사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100여 년 전 북한산 산영루 앞 계곡에 아이가 앉았던 것으로 보이는 바위. 바위는 100여 년 전보다 바닥으로 조금 더 내려 앉았고, 근처 수풀이 자라 이제 바위 뒤로 산영루는 잘 보이지 않는다. 김홍준 기자

100여 년 전 북한산 산영루 앞 계곡에 아이가 앉았던 것으로 보이는 바위. 바위는 100여 년 전보다 바닥으로 조금 더 내려 앉았고, 근처 수풀이 자라 이제 바위 뒤로 산영루는 잘 보이지 않는다. 김홍준 기자

을축년 대홍수는 7월 9일부터 9월 초까지 4차례 걸쳐 일어났다. 이 기간 태풍은 4개나 지나갔다. 1, 2차인 7월 9~12일, 7월 15~19일에 748.9㎜가 쏟아졌다. 한강 물이 광화문 앞까지 들이닥치고, 용산역 기차가 물에 잠겼으며, 한강의 흐름이 바뀌었을 정도다.

조선일보 7월 18일 자 호외는 이렇게 전한다. ‘뚝섬 상부에 있는 신천리, 잠실리 두 동리는 약 1000호에 약 4000명이 전부 물속에 들어서 모두 절명 상태에 있다는데 그곳은 무인고도(無人孤島)와 같이 되어 배도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구조할 도리가 전연 없으며 17일 밤 10시경부터 살려 달라는 애호성이 차마 들을 수 없이 울려왔는바 그동안 모두 사망하였는지도 알 수 없더라.’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은 “근처의 봉은사 주지였던 청호스님이 뱃사람을 수소문해 708명을 구해 절로 돌아오기도 했다”고 전했다. 을축년 대홍수 사망자는 647명. 피해액은 1억 300만원으로,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약 58%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북한산 산영루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쓸려 내려간 뒤 2014년 복원 됐다. 사진은 지난 8일의 산영루 모습. 김홍준 기자

북한산 산영루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쓸려 내려간 뒤 2014년 복원 됐다. 사진은 지난 8일의 산영루 모습. 김홍준 기자

이때 유실된 것으로 알려진 북한산성의 대표적인 건물이 산영루다. 산영루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603년 나온 『유삼각산기』에 이정구가 ‘산영루 옛터’라고 쓴 것으로 보아 이미 그 전에 만들어져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수차례 중수와 훼손이 거듭됐다. 그러다가 1915년 7월의 집중호우로 타격을 입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0년 뒤 을축년 대홍수 때 10개의 주춧돌만 남긴 채 유실된 것이다. 박현욱 경기문화재단 연구사는 “현재까지 산영루는 사진 등의 기록을 통해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다”며 “하지만 최근에 1935년 이후 유실설도 나와 더 검토해 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산성이 들어서면서 만들어진 대서문 옆 수문은 이미 18세기에 큰비에 쓸려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1745년 성능 스님이 그린 ‘북한도’에 수문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산성은 구한말에 접어들면서 관리가 제대도 안 됐다. 실제 고종실록에도 1893년 5월 ‘북한산성 중수에 공로가 있는 자들에게 시상함’이란 기사 이후 북한산성 관련 내용은 없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으로 승병이 강제 해산되자 사찰들이 버려졌다. 금위영·어영청·훈련도감의 병영지인 유영은 이미 19세기 말에 무너져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와중에 1915년 집중호우와 1925년 을축년 대홍수까지 겹쳐 북한산성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을축년 대홍수 때는 행궁지 옆으로 없던 계곡이 생겼다는 북한동 주민의 증언도 있다.

박현욱 연구사는 “국운이 쇠락하는 시기에, 행정력이 북한산성까지 미치지 못했을 것”이라며 “북한산성의 유적들은 1900년 전후의 정세 혼란기 속 '관리 소홀→홍수와 산사태 등 자연재해로 인한 멸실'의 패턴으로 사라졌다"고 말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북한산성에 143개소가 있었던 성랑의 터. 성랑은 북한산성의 초소로, 19세기 후반 관리 소홀로 피폐해 진 뒤 큰비를 여러 차례 맞고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 경기문화재단]

북한산성에 143개소가 있었던 성랑의 터. 성랑은 북한산성의 초소로, 19세기 후반 관리 소홀로 피폐해 진 뒤 큰비를 여러 차례 맞고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 경기문화재단]

고양시 관계자는 “현재 행궁은 발굴 완료 상태로 6차 정비 중”이라며 “행궁이 100여년 전 산사태로 유실된 만큼 복원은 배수로 정비 등으로 장기간 안정성이 보장돼야 추진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산영루는 2014년에, 동장대는 1996년에 복원됐다. 고양시는 북한산성을 세계유산으로 올리기 위한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 관계자는 "현재 계속되는 빗속에 100여 년 전 북한산성이 큰비로 입은 피해가 재발하지 않도록 현장 점검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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