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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14년 봉사했는데 환자 손에 숨졌다" 제2 임세원 비극

중앙일보

입력

5일 오전 9시 25분쯤 입원 환자가 퇴원하라는 의사를 흉기로 찔러 사망케한 부산 북구 화명동의 한 의원. 송봉근 기자 20200805

5일 오전 9시 25분쯤 입원 환자가 퇴원하라는 의사를 흉기로 찔러 사망케한 부산 북구 화명동의 한 의원. 송봉근 기자 20200805

“14년간 중증장애인 요양시설에서 촉탁 의사로 봉사하던 동생인데 환자 칼에 생을 마감하다니 황망할 따름입니다.”
5일 오전 10시 10분쯤 부산 북구 한 정신병원에서 조현병 환자가 휘두른 칼에 정신과 의사 김모(60)씨가 사망했다. 이날 김씨의 빈소가 마련된 부산 동래구 한 장례식장에서 취재팀과 만난 형은 참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5일 오전 부산 북구 정신과 병원에서 환자 흉기 난동 #칼에 찔린 정신과 의사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사망 #유족 “14년간 의료봉사하던 동생 황망하게 죽어”

형은 “홀어머니 밑에서 고학으로 부산대 의대에 입학해 28년간 월급의사로 살아온 동생이었다”고 소개한 뒤 “소신껏 진료하고 싶다는 신념 하나로 지난해 4월 개원해 겨우 병원이 자리잡아가나 싶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안타까워했다.

김씨의 정신과 병원에는 18명의 환자가 입원해 있었다. 이 가운데 한 환자가 허용되지 않은 곳에서 담배를 피우는 등 병원 지침을 따르지 않자 김씨가 퇴원을 요구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환자는 외출 후 인근 가게에서 흉기를 사 온 뒤 갑자기 진료실로 들어가 김씨를 수차례 찔렀다. 김씨는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경북 영천에서 3남 1녀의 둘째로 태어난 김씨는 중학교 때부터 성적이 뛰어났다고 한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주위에서 의대 진학을 말리기도 했지만 김씨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부산대 의대에 입학했다. 형은 “정형외과를 전공했지만, 정신과로 바꾸려고 2년간 의료봉사를 하는 등 정신과 치료에 애착이 남달랐다”며 “환자들 사이에서도 친절한 의사로 인정받았다”고 전했다.

28년간 월급의사로 살던 김씨는 소신껏 진료하고 생을 마감하겠다는 의지로 개원을 준비했다. 하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병원이 입주하려던 10층 건물의 학원장 등 일부 상인이 학생들이 불안해할 수 있다며 관할 북구청에 민원을 넣은 것이다. 의료법에 따르면 30병상 미만 의원을 개설하려면 근무 의료인 수 등 법적 요건을 갖춰 관할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신고만 하면 된다. 하지만 북구청은 민원을 이유로 신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김씨는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2년간 이어졌다. 3심 끝에 대법원은 ‘신고를 수리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행정소송 기간 중 김씨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대구의 한 정신과 병원에서 월급의사로 일했다. 형은 “월세와 관리비를 내지 않으면 건물주가 나가라고 할까 봐 동생은 꼬박꼬박 다 냈다”며 “행정소송 승소 이후 북구청을 상대로 1억5000만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진행 중이다. 오는 8월에 최종 판결이 나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5일 오전 9시 25분쯤 입원 환자가 퇴원하라는 의사를 흉기로 찔러 사망케한 부산 북구 화명동의 한 의원. 송봉근 기자 20200805

5일 오전 9시 25분쯤 입원 환자가 퇴원하라는 의사를 흉기로 찔러 사망케한 부산 북구 화명동의 한 의원. 송봉근 기자 20200805

김씨는 중증장애인 요양시설인 경주 푸른마을에서 14년간 촉탁의로 활동해왔다. 형은 “3시간 진료 보려고 4시간을 이동해 경주까지 갔다. 인연의 끈을 소중히 여기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환자를 치료해오던 동생인데 이런 일을 당해서 안타깝다”며 눈물을 훔쳤다.

고(故)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30대 환자가 휘두른 칼에 숨진 지 1년 8개월 만에 또다시 정신과 의사가 환자에 의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의료인에 대한 폭행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일명 '임세원법'(의료법 일부 개정안)이 2019년 9월부터 시행 중이지만 부산에서 똑같은 사고가 또 발생한 것이다. 형은 “임세원법 처벌 조항이 너무 미약해 범죄가 재발하고 있다”며 “처벌 조항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이은지 기자 lee.eunji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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