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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안희정·박원순은 왜 ‘임금님 놀이’에 빠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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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민주당의 갑질 DNA

2017년 청주·천안·아산 등 수해 피해 지역을 방문한 안희정 전 지사가 본인 SNS에 피해자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사진을 올렸다. 이런 배려에 칭찬이 이어졌다. 하지만 『김지은입니다』엔 ’수해 현장을 방문했을 때 공식 일정은 (홍보사진 찍은 후) 10여 분만에 끝나고 안 전 지사는 평소 연락하던 여성을 불러내 함께 술에 취해 어울렸다“는 증언이 있다. 박원순 전 시장은 2019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시대착오적인 인권 감수성으로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사진 안희정 전 지사 페이스북, 방송 캡처]

2017년 청주·천안·아산 등 수해 피해 지역을 방문한 안희정 전 지사가 본인 SNS에 피해자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사진을 올렸다. 이런 배려에 칭찬이 이어졌다. 하지만 『김지은입니다』엔 ’수해 현장을 방문했을 때 공식 일정은 (홍보사진 찍은 후) 10여 분만에 끝나고 안 전 지사는 평소 연락하던 여성을 불러내 함께 술에 취해 어울렸다“는 증언이 있다. 박원순 전 시장은 2019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시대착오적인 인권 감수성으로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사진 안희정 전 지사 페이스북, 방송 캡처]

온 나라를 뒤집어놓은 유명 사건이다 보니 양측의 엇갈린 진실 공방이라면 모를까 새로운 내용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책을 펼치기 무섭게 알려진 성폭력을 뛰어넘는 ‘제왕적 갑질’ 묘사가 이어졌다. 2018년 3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을 고발한 김지은(전 수행비서)씨의 책 『김지은입니다』 얘기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은 지난 4일 ‘조배죽(조직을 배신하면 죽는다)’이라는 책 속 건배사를 인용하며 더불어민주당의 비민주적인 조직 문화를 조폭에 빗대 비판했다. 사람보다 조직을 우선시하는 민주당의 조폭식 문화도 놀랍지만 이 책엔 더한 얘기가 많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오로지 보상과 채찍으로 움직이는 권력 작동 방식, 그리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관련 수사가 왜 차질을 빚고 있는지에 대한 답도 여기 있다.

책 『김지은입니다』는 갑질 보고서 #SNS 홍보사진과 다른 봉건적 놀음 #‘조배죽’ 외치는 폐쇄적 조직문화 탓 #대통령 “갑질 근절”도 내 편엔 예외

압권은 갑질이라는 단어로는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시대착오적이고 봉건적인 ‘임금님 놀이’(권수현 여성학자)다. 사대부들이 종 부리던 조선시대도 아니고 21세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박 전 시장을 고소한 전직 비서도 성희롱과 별개로 속옷 빨래 심부름 등 비슷한 증언을 한 걸 보면 안 전 지사만의 개인적 일탈이라기보다 여권 정치인들 사이에서 임금님 놀이가 만연한 게 아닌지 의심이 된다.

2014년 이른바 ‘땅콩 회항’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갑질 고발이 이어지기 시작한 지 오래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사를 비롯해 수시로 갑질 근절을 언급하며 이 정권의 치적으로 내세웠는데, 민간 기업도 아니고 세금 받아 국민에 봉사하는 민주당의 선출직 공직자들이 왜 이런 전근대적이고 퇴행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일까. 안 전 지사 사례를 통해 민주당의 독특한 갑질 문화를 좇아 봤다.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나 자유를 빼앗겨 자기 의사나 행동을 주장하지 못하고 남에게 사역(使役)되는 사람. 표준국어대사전의 ‘노예’ 정의다. 이 정의대로라면 김지은씨는 안 전 지사의 수행비서였다기보다 노예였다. 자신을 돌볼 여유 없이 하루 24시간 원치 않는 안 전 지사 일가 수발을 들어야 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안 전 지사가 구두를 편히 신을 수 있도록 딱 정해진 위치에 정해진 각도로 구두를 놓아야 한다. 안 전 지사에게 오는 모든 전화는 착신 전환을 해서 밤이든 새벽이든 자다가도 일어나 전화를 받고 하루 세 번 보고한다. 샤워 중에도 전화를 받을 수 있도록 밀봉해서 들어간다. 안 전 지사는 집무실 전화뿐만 아니라 본인의 휴대전화로도 전화를 직접 걸지 않으니 그가 통화를 원할 때면 번호를 대신 눌러 상대가 전화를 받는 정확한 순간에 휴대전화를 건네준다. ‘슈트발’을 이유로 담배·안경닦이 등 작은 개인물품도 절대 양복에 넣지 않기에 전부 갖고 있다가 손짓하면 전달한다. 퇴근하고 집에 간 후에도 부르면 달려가야 한다. 주로 사적 지시다.’

책에 열거된 주요 업무에는 가족 심부름도 있다. ‘안 전 지사가 아들과 요트 타러 갈 때 강습 예약을 한다. 공관엔 가족 일 돕는 사람이 따로 있지만 안 전 지사 아내가 친구 모임에서 술을 마셔 운전을 못 하면 자다가도 불려 나가 대리운전을 해야 했고, 유명 빵이 먹고 싶다고 하면 아무리 멀어도 식사를 거른 채 사와야 했다. 안 전 지사 지인을 위해 고춧가루를 사서 보냈다. 비용은 수행비서 개인 부담이었다. 의약품을 대리 처방받아 전달하고 보험 등 금융 관련 일도 대신 처리했다.’ 할 이유도, 해서도 안 되는 불법적인 일까지 휴일을 반납하며 비일비재로 했지만 공식적 문제 제기는 할 수 없었다. 안 전 지사 말 한마디면 바로 해고되는 별정직 비서라 근본적으로 고용 불안정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조배죽’으로 대변되는 비민주적이고 폐쇄적인 조직문화 탓이 크다. 김지은씨는 도청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작은 일조차 절대 밖에 누설하면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건 지사님 기분”이라며 외면당했다고 주장한다.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난 성폭력과 달리 갑질과 관련해선 양측 주장이 엇갈린다. 1심 재판 안 전 지사 측 오선희 변호사(대륙 아주)는 “책을 읽지 않아 구체적 내용은 모른다”며 “다만 행위 하나하나를 지금 언급하는 건 무의미하며, 김지은씨 주장은 대부분 허위라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반면 김지은씨를 대리한 노무사 출신 문은영 변호사는 “재판 과정에서 책에 언급된 갑질을 뒷받침하는 상당한 분량의 입증자료가 증거로 제출됐다”고 반박했다.

충남도에서 김지은씨와 함께 일했던 안 전 지사 동영상 담당 정연실씨는 1심 공판에서 “안 전 지사 말 한마디로 모든 일이 결정됐고, 바른 소리 하면 사라진다는 얘기를 오래 일한 사람들에게 들었다”고 증언했다. 최근 SNS엔 “서울 출장 갈 땐 같은 기차를 타는 게 자연스러운데 기차역에서 안 전 지사와 마주치면 안 된다고 해서 몇 시간 전후로 따로 움직였다”는 또 다른 갑질 사례를 털어놓기도 했다.

모두 문 대통령이 갑질 근절을 강조하던 2017~18년 벌어진 일들이다. 문 대통령은 2017년 내 편이 아닌 박찬주 전 육군 대장의 갑질 의혹 사건(이후 무죄 판결) 땐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군과 공직사회 갑질 문화 근절 대책을 마련하라”고 강하게 주문했다. 하지만 ‘성적 갑질’로도 불린 안희정 사건에 대해선 유감 표명은커녕 그의 모친상에 대통령 이름으로 조화를 보내 안 전 지사의 건재를 세상에 확인시켜줬다. 1심 판결 후 SNS로 김지은씨를 조롱했던 안 전 지사 아들은 충남도지사 정무비서관 출신인 안희정계 이후삼 의원실에 공개채용 없이 특채됐고, 그의 낙선 후 21대 국회에선 민주당 강준현 의원실 비서로 고용됐다. 반면 김지은씨는 물론 그의 편에서 증언한 보좌진 모두 일자리를 잃었다.

이런 민주당 정권 아래서 성희롱이든 일반 갑질이든 현재 권력을 상대로 부당함을 고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오히려 제왕적 권력은 공고해진다. 범죄 심리학자인 이수정 교수(경기대)는 『범죄영화 프로파일』에서 “(문제 제기를 받아주는 사람 없이)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는 권위에 대한 복종 성향이 더 뚜렷해진다”며 “밥줄이 달려 명령을 거절하기 어렵다는 면에서 위계나 위력에 의한 성범죄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민주당 보좌진협의회장을 지낸 조현욱 보좌관(민주당 조응천 의원실)은 “민주당만의 문제는 아니다”며 재임 기간을 문제 삼았다. 그는 “초선 땐 안 그러다가 (의전 등에) 익숙해지면 벌어지는 일들”이라며 “특히 지자체장은 고립된 공간에서 국회의원 보좌진(9명)보다 훨씬 많은 수의 의전을 받다 보니 갑질에 취약하다”고 했다. 안 전 지사는 2010년부터 김지은씨 폭로로 지사직을 내려놓을 때까지 8년, 박 전 시장은 2011년부터 9년간 장(長)으로 있었다. 권수현 여성학자도 최근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민주당 출신) 안희정·오거돈(성추행으로 물러난 전 부산시장)·박원순의 공통점은 가해자가 되기 좋은 조건에서 지자체장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박 전 시장 전임자인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안 전 지사나 박 전 시장 행태는 10년 전 눈높이로도 비상식적”이라며 “민주당이 집권한 지난 10년 새 (인권의식이) 많이 후퇴했다”고 했다. 민주당의 조직 문화가 문제라는 해석이다. 조 보좌관은 “갑질은 당과 무관하다”면서도 “미래통합당은 관료적으로 억누른다면 민주당은 가족적 분위기를 내세워 공사가 뒤섞이는 갑질이 많다”고 했다.

끊이지 않는 민주당 갑질

일단 밖으로 드러난 갑질은 민주당이 월등히 많다. 21대 국회 1호 법안 기록 욕심에 보좌진에게 며칠씩 밤샘 줄서기를 시킨 박광온 의원이나 공항 직원에게 욕설하는 거로 모자라 공항공사 사장에게 전화를 건 20대 국토위 소속 김정호 의원, 20살 많은 동장을 폭행한 최재성 강북구의원 등 최근의 갑질 논란은 대부분 민주당에서 불거졌다.

갑질 고발 공익단체인 ‘직장갑질 119’ 박점규 운영위원은 “상사가 운전기사에게 자기 친구를 데려다주라는 식으로 공적 업무와 상관없는 일을 시키는 것도 요즘 눈높이에선 다 갑질”이라며 “비서에게 종 부리듯 아무 일이나 시키는 임금님 놀이를 막으려면 정치권에서도 근로계약서 같은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정치권, 특히 민주당 내에선 너무나 요원한 얘기다. 아무리 심한 갑질을 당해도 신고하면 본인부터 직업을 잃으니 참을 수밖에 없다. 보좌진의 신분 보장을 제도화하는 법률 개정 요구도 번번이 묵살당했다. 의석수 앞세워 무슨 법이든 뚝딱 만드는 21대 민주당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지켜볼 일이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