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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 추락하고 민심 흔들리던 고려, 그때 "서경 천도" 나왔다[픽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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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1천 년래 제일의 사건’
역사학자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에서 고려 시대 추진됐던 서경 천도운동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만일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ㆍ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1천 년래 제일 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픽댓] 히스토리

서경 천도운동은 고려 474년 역사(918~1392)의 딱 중간 지점인 1130년대 중반에 일어났습니다. 건국 200년을 지난 고려는 안팎으로 만만치 않은 도전에 직면한 상황이었습니다.

안으로는 왕의 장인이자 외조부인 이자겸이 반란을 일으켜 왕권을 크게 흔들었고, 밖으로는 거란과 북송을 잇달아 누른 금나라가 고려에 사대를 요구했습니다. 이자겸의 난으로 퇴위 직전까지 갔다가 기사회생한 고려 인종은 동요하는 민심을 수습하고 추락한 왕권을 회복시키고 싶어했습니다. 서경 천도운동은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고개를 들었습니다.

평양성 현무문 [중앙포토]

평양성 현무문 [중앙포토]

정국 돌파용 카드
고려가 건국 이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국제 정세의 덕을 봤습니다. 송(중원)-거란(만주)-고려(한반도)가 3각 균형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란이 강성하긴 했지만 송과 고려가 군사적으로 연합하면 우위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거란은 고려에 사대까지 요구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등장한 여진족의 금나라가 중원을 차지하자 힘의 균형이 무너졌습니다. 거란에 맞섰던 고려가 금나라의 사대 요구엔 고개를 숙인 이유입니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사대관계를 맺게 되자 고려는 반금나라 여론이 확산하면서 민심이 악화됐고 왕권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인종은 이자겸의 난을 제압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내부 분열을 이용한 것일 뿐 왕권 자체의 힘으로 위엄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안팎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지만 정국을 타개할 마땅한 수습책이 없다는 것이 인종의 고민이었습니다.

12세기 중엽 동북아시아

12세기 중엽 동북아시아

이런 상황에서 “서경으로 천도하면 금나라가 스스로 항복하고 주변 36개국이 조공하게 될 것”이라는 묘청의 주장은 인종에게 매우 솔깃한 제안으로 다가왔습니다. 서경 천도는 반금(反金) 여론을 결집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국왕이 쥘 수 있는 매력적인 카드였습니다.

고려 왕실의 서경 활용법 
그렇다면 왜 서경(평양)이었을까요. 서경은 고려가 건국되면서 제2의 수도로 인정받으며 독자적인 정부 기구 설치하는 등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같은 배려 속에서 서경은 개경 다음으로 행정·문화적 인프라를 구축했고, 과거 급제자도 대거 배출하는 등 급속한 발전을 이뤘습니다. 그렇지만 서경은 전 왕조였던 신라 시대에 받은 차별에 대한 보상 심리도 강한 지역이었습니다.

고려 국왕들은 서경의 이런 특성을 영리하게 이용하곤 했습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가까운 시일 내에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을 옮기겠다고 선언한 것도 이러한 서경의 정서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건국 당시 열세에 있었던 왕건은 후백제, 신라를 상대하면서 서경 일대 호족과 옛고구려계 주민의 힘이 필요했고, 그의 고구려 계승의지나 서경천도 선언은 지지를 끌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930년 후삼국 통일의 분기점인 고창전투에서 후백제를 격파하고 이듬해 신라가 항복을 약속하자 왕건의 태도는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근래에 서경을 완전히 수리하고 백성을 옮겨 채운 것은 지력에 의거하고 삼한을 평정하고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민가의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고 큰 바람이 불어서 관사가 무너졌으니 대체 무슨 재변이 이렇게까지 일어나는가” (『고려사』 태조 15년 5월)

서경의 지지 여부가 더이상 대세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본 것이죠. 다만 후삼국 통일 이후에도 민심은 어수선했고, 또 지방 호족세력을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했던 만큼 왕건과 고려 왕실에 서경은 여전히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고려 왕실이 서경을 제2의 수도로 삼고 개경 못지않은 인프라를 채워 넣으며 왕실을 보호하는 울타리로 삼은 이유입니다. 또, 왕건의 고구려 계승 의지나 북진정책을 위해서라는 명분도 있었기 때문에 서경에 대한 투자는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웠습니다.

후삼국 시대

후삼국 시대

3대왕 정종도 서경을 활용한 군주였습니다. 그는 2대왕 혜종이 죽은 뒤 벌어진 왕위 계승전에서 서경유수 왕식렴과 평주의 박수경 등 서경 일대 호족들의 지지를 얻어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정종은 실제 천도까지 추진했지만 무리한 징발과 공사로 민심을 잃었고, 그의 동생이자 다음 왕인 광종은 천도 계획을 중단했습니다. 예종 때도 윤관의 여진 정벌과 맞물려 서경 천도 목소리가 잠깐 나왔지만, 현실적 어려움을 들어 다시 잦아들었습니다.

"천도를 하면 금나라가 항복합니다."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금나라와 대결을 벌였다면 고려는 강국이 되었을까요. 가정일 수밖에 없는만큼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다만 학계에선 당시 고려가 군사적으로 금나라와 대적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는 의견이 다수입니다. 고려는 여진 정벌에 17만명을 동원할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기도 했지만, 이 시기엔 달랐습니다.

경원 이씨 집안이 국가를 좌지우지하면서 기강이 무너진 데다 이자겸의 난으로 국력이 많이 무너진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송나라를 제압하고 중원을 차지한 금나라를 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한 발상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서경 천도에 귀를 기울였던 인종도 금나라 정벌이라는 서경파의 주장에 대해선 선뜻 동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서경파는 '송나라가 금나라를 격퇴했으니 군사를 일으켜 호응하자'며 거짓 정보를 가져와 부추기는가 하면 왕의 행차에 맞춰 기름이 들어간 떡을 서경의 대동강에 던져 수면이 빛나게 하고는 '용이 침을 토했으니 상서로운 징조'라고 속이는 등 연달아 무리수를 두기도 했습니다.

문화재청이 2019년 10월 29일 '지리전서동림조담'을 보물 지정예고했다. 조선 시대 관상감(觀象監) 관원을 선발하는 음양과(陰陽科)의 시험 과목 중 하나로 널리 사용된 풍수지리서다. 중국 오대 사람인 범월봉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뉴스1]

문화재청이 2019년 10월 29일 '지리전서동림조담'을 보물 지정예고했다. 조선 시대 관상감(觀象監) 관원을 선발하는 음양과(陰陽科)의 시험 과목 중 하나로 널리 사용된 풍수지리서다. 중국 오대 사람인 범월봉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뉴스1]

물론 고려는 풍수도참 사상이 유행했고, 이에 근거한 서경 천도론은 지지를 얻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풍수도참사상은 어디까지나 보조적 도구일 뿐, 국가 대사를 그에 맞춰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서경파가 천도의 이점을 풍수지리적 설명 외엔 합리적으로 제시하지 못하자 동력도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천도론에 유보적이던 조정 신료 가운데 차츰 반대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는 김부식을 중심으로 결집하게 됩니다.

개경파는 문벌귀족 사대파, 서경파는 신진관료 자주파?
서경 천도운동에서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을 흔히 문벌귀족 vs 신진관료, 또는 사대파 vs 자주파 혹은 유교 vs 불교+낭가의 대결 구도로 보곤 합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러한 이분법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일단 개경파를 주도한 김부식은 문벌귀족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김부식의 집안은 조부 때까지 경주에서 향직에 종사하는 향리였다가 부친 김근이 과거에 합격하면서 비로소 중앙 관료로 진출했습니다. 그마저도 좌간의대부(5품)까지 승진했을 뿐 고위 관직에 오르진 못했습니다.
김부식 자신도 언급했듯이 문벌귀족의 특권인 음서로 관직에 오르는 건 기대할 수도 없는 한미한 가문에 가까웠던 셈이죠. 그랬던 김부식의 집안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김부식 4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면서입니다.

김부식   [연합뉴스]

김부식 [연합뉴스]

또 일각에선 김부식이 유학자라서 금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따랐다고 하지만 맥락이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김부식은 송나라에서 건너온 유학을 공부한 자부심 강한 학자였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사대의 대상은 중원의 정통 왕조 송나라이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세계관은 그가 편찬한 『삼국사기』에서도 강하게 드러납니다. 또 유학자들이 힘보다 명분을 추종한다는 것은 훗날 조선의 병자호란 때도 나타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김부식의 맏형 김부필은 윤관의 여진 정벌에 참전했다가 전사했습니다. 김부식이 금나라에 대한 사대를 추종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한편 서경파의 핵심인 정지상도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집안에 대해선 어머니의 성이 노씨(盧氏)였다는 것만 알려진 것을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역시 자신의 노력으로 고려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양 파벌의 리더였던 김부식과 정지상은 고향만 다를 뿐, 배경과 계급은 비슷했습니다. 탁월한 유학자라는 공통점도 있었습니다. 다만 개경파는 과거 급제자 출신의 신진 엘리트 그룹이 많았고, 서경파엔 승려 묘청이나 일관(日官) 백수한 등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한편 정치적으로 같은 파벌에 속했던 인사들이 서경 천도 문제를 놓고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서경 천도에 반대했던 임원후는 국왕 인종의 장인이었습니다. 그는 인종이 서경 천도에 호의적일 때부터 반대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또 반대파 중 문공유는 찬성파인 문공인의 동생이었는데 이들은 이자겸에 반대하다가 유배를 갔던 정치적 동지이기도 했습니다.

인종은 정말 천도를 생각했을까?
국왕 인종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조선을 세우고 수도를 옮긴 이성계와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이성계는 영흥 출신으로 개경에 기반이 없었던 만큼 도읍을 한양으로 바꾸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고려 왕실은 개경에서 힘을 키운 가문입니다. 왕건이 궁예를 설득해 도읍을 철원에서 개경으로 옮기도록 했을 정도입니다. 그런 고려 왕실이 개경을 두고 다른 지역으로 간다는 것은 선택하기 어려운 옵션이었습니다.

인종이 서경 천도에 관심을 보인 건 무너진 왕권을 세우고 국력을 집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만큼 인종은 개경파든 서경파든 어느 한 곳에 힘을 싣기보다는 적절히 균형을 두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경에 순행하면서도, 수도 이전의 결정 단계에선 확답을 주지 않고 여지를 남겼습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결국 묘청의 난을 부른 화근이 됐습니다.
인종의 태도에 실망한 서경파는 묘청의 난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돌파구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충분한 준비가 없었던 만큼 식량 부족과 지도부의 내부 분열이 겹쳐 진압됩니다. 정치적 역량 부족과 낭만적 국제정세관, 합리적이지 못한 수도 이전의 근거 등의 결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좌초한 것이죠.

북한 개성에 위치한 고려시대 왕궁터인 만월대(滿月臺) 전경. [중앙포토]

북한 개성에 위치한 고려시대 왕궁터인 만월대(滿月臺) 전경. [중앙포토]

서경 천도는 장기적인 구상 아래 진행됐다기보다는 그때그때 정치적 목적이나 현안에 맞춰 제시됐고, 충분한 준비가 없었던 만큼 국론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무산되곤 했습니다. 이런 일이 여러 차례 이어졌고, 그때마다 서경 민심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묘청의 난 때 미처 합류하지 못한 서경파의 리더 정지상과 백수한이 개경에서 처형됐는데도 서경파가 관군에 맞서 1년간 저항했다는 것은 적지 않은 서경 민심의 동조를 얻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서경 천도운동과 묘청의 난은 서경이 정치적 카드로 활용된 마지막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그 뒤에는 분열된 민심만 상처로 남았습니다.

다시 수도 이전의 공방전 
건국 70년을 넘긴 대한민국도 최근 수도 이전으로 여론이 뜨겁습니다.
수도 이전은 19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전 일대에 임시행정수도 건설 계획을 세우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80~1990년대엔 행정기관 일부를 대전으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신행정수도 건설계획을 발표했지만, 헌법재판소가 위헌이라고 결정하면서 행정중심 복합도시로 일단락됐습니다. 지난달 기준으로 세종시에는 22개 중앙행정기관과 21개 소속기관이 자리 잡았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국회와 청와대, 정부 부처 모두 '행정수도 이전' 언급으로 세종시 집값이 급등하고 있는 가운데 26일 밀마루전망대에서 바라본 세종시. 김성태 기자

더불어민주당이 국회와 청와대, 정부 부처 모두 '행정수도 이전' 언급으로 세종시 집값이 급등하고 있는 가운데 26일 밀마루전망대에서 바라본 세종시. 김성태 기자

최근 여권에서 수도 이전 카드를 다시 꺼내든 것에 대해 야권에선 서울 부동산 정책 실패를 덮으려는 정치적 목적이라고 비판합니다. 또, 호남보다 인구가 많아진 충청지역 표심을 공략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실제로 여권은 수도 이전 카드로 효과를 보기도 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16대 대선 때 수도 이전으로 충청 표심을 잡으며 “재미를 좀 봤다”고 말한 적도 있지요. 그래서 여권이 이 문제를 2년 뒤 대선까지 끌고 갈 것이라는 예상도 있습니다.

수도권 인구 집중 완화와 국토의 균형발전은 국민 대다수가 동의하는 과제입니다. 이를 위해선 여러 가지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수도 이전이 들어가지 못하란 법도 없습니다.
다만 수도 이전은 적지 않은 혼란을 야기할 수밖에 없고, 이를 최소화하려면 국론의 동의 과정과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거쳐 추진되어야 합니다. 충분한 준비와 동의를 거치지 못한 채 밀어붙였을 때 어떤 난맥상이 펼쳐지는지 고려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유성운·김태호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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