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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런스 소설 딛고 동서양 사상 횡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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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7호 21면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백낙청 지음
창비

백낙청의 문학과 사상 긴 여정 #로런스에서 시작, 정점에 개벽사상

외설이냐 예술이냐, 문학에서 흔히 벌어지는 논쟁인데, 이때마다 빠지지 않는 인물이 데이비드 허버트 로런스(1885~1930)였다. 영화로도 제작돼 많이 알려진 소설 『채털리부인의 연인』을 쓴 작가 말이다. 국내에서는 대개 ‘로렌스’로 발음해 왔는데, 이번 신간의 저자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로런스로 교정했다. 발음만 바꾼 것이 아니다. 성애 문학, 에로물, 심지어 포르노에 가깝다는 비난까지 받았던 로런스에 대한 본격적인 재평가가 앞으로 이 책을 기점으로 진행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에서 로런스는 ‘서양의 개벽사상가’로 다시 태어난다. 책 제목이 선언적이다. 언뜻 이질적으로 보이는 두 단어의 조합이 궁금증을 유발한다. 로런스 자체가 우선 논쟁적 인물인데, 거기에다 ‘개벽사상’은 또 무슨 말인가? 이해하기 쉽지 않은 두 단어에 대한 호기심은 저자가 백낙청이기에 더욱 강도가 높아진다. 60년대 후반부터 계간지 ‘창비’를 이끌어오며 지식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백낙청은 사회운동 분야에서도 역할을 했지만 그의 출발은 본래 문학비평이다. 그가 1972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받은 박사 논문의 소재가 로런스였다. 논문 제목은 ‘D. H. 로런스의 현대문명관’. 박사 논문도 이번에 이 책과 함께 번역, 출간됐다.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로런스 소설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청년기 이래 박사과정을 거쳐 팔순을 넘겨서까지 그를 떠나지 않고 있으니, 백낙청의 평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로런스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 같다. 관심의 방향은 시종일관 ‘문명 비평’의 시각을 유지한다.

20세기 초반 영국의 소설가, 시인, 평론가로 활동했던 데이비드 허버트 로런스. 외설 시비가 끊이지 않던 작가에서 ‘서양의 개벽사상가’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사진 창비/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20세기 초반 영국의 소설가, 시인, 평론가로 활동했던 데이비드 허버트 로런스. 외설 시비가 끊이지 않던 작가에서 ‘서양의 개벽사상가’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사진 창비/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백낙청이 걸어온 문학과 사상의 기나긴 여정이 담긴 이 책에서 로런스는 일종의 ‘베이스 캠프’ 역할을 한다. 로런스를 거점으로 하여 동서양의 철학과 사상이 종횡으로 비교된다. 책의 형식은 문학비평이지만 그 내용은 동서양 문명과 사상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 정점에 개벽사상이 놓여 있는 모습이다.

백낙청은 로런스가 서양의 전통적 사고방식을 뛰어넘는 시도를 한 것으로 해석한다. 예컨대 로런스가 작품에서 육체를 부각한 것만 해도 정신의 우위를 강조해온 서양 전통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식이다. 게다가 로런스가 육체만 강조한 것도 아니었다. 사유의 중요성도 계속 언급했다. “인간은 생각의 모험가”라고 정의했고, 장편소설의 중요한 기능으로 ‘사유의 모험’을 들었다. 궁극적으로 로런스는 육체와 정신의 균형을 강조하는데 동양의 전통 사유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진리에 대한 시각도 흥미롭다. 로런스는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결합이 완성되는 삶의 순간적인 상태”로 진리를 규정했다. 이때의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은 단지 육체적 차이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백낙청은 이를 동아시아의 음양론과 상통하는 요소로 해석한다. 이런 점들이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을 지배해온 본질과 현상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로런스가 개벽사상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로런스와 개벽사상을 연결한 것은 백낙청의 ‘사유의 모험’이다. 개벽은 동학(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등 한국의 전통 종교에 유래를 둔다. 개벽은 서양의 혁명이나 개혁과 유사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서양의 혁명은 정치나 경제의 구조를 바꾸는 데 주안점을 둔다면, 개벽은 그 중심에 인간의 마음을 배치한다. 나의 마음과 너의 마음에 대한 성찰이 없이 진정한 개혁이나 개벽은 요원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 공부’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로런스가 서양 철학의 한계를 서술하고 사회변혁이나 혁명에도 관심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마음을 중시하는 개벽사상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는 앞으로 계속 풀어가야 할 과제로 보인다.

배영대 학술전문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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