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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0가구서 물건 단 3개…보유세 맞물려 ‘전세 종말론’ 고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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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7호 03면

계약 2+2년, 인상 5% … 격변의 전세시장

계약갱신청구권과 전·월세상한제가 국회를 통과한 지난달 30일, 서울 송파구의 한 중개업소에선 전·월세 매물 정보가 모두 사라졌다. [연합뉴스]

계약갱신청구권과 전·월세상한제가 국회를 통과한 지난달 30일, 서울 송파구의 한 중개업소에선 전·월세 매물 정보가 모두 사라졌다. [연합뉴스]

“전세란 조선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가옥 임대차 방법이다.” 1910년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관습조사보고서(慣習調査報告書)』의 일부다. 이 보고서는 전세 관련해서 지금까지 발굴한 가장 이른 사료다. 관습조사보고서는 전세에 대해 “차주가 일정한 금액(가옥 가격의 반액 내지 7·8할)을 소유자에게 기탁하면 별도의 차임을 지불하지 않고 반환 시 기탁금을 돌려받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과 똑같은 방식이다. 전세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선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적어도 100년 이상 서민의 주거 안정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해온 것만은 확실하다.

저금리 시대, 재산세·종부세 강화 #임대인들 월세 선호로 전세 감소 #전셋값 크게 올라 반전세 확 늘듯 #금융위기 이후에도 소멸론 등장 #2012년 월세 비중이 더 높아져 #집값 상승 땐 명맥 유지 전망도

임차인은 주택을 매입할 때의 50~60% 정도 비용으로 일정 기간 안정적인 거주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취득·재산세 등 각종 세금 부담이 없고, 집값이 떨어질까 염려할 필요도 없다. 목돈을 강제로 저축해 미래에 집을 사는 ‘징검다리’ 역할도 했다. 주택 매수자에겐 집을 살 때 모자란 목돈을 보충하는 통로였다. 전셋값이 지금의 주택담보대출 역할을 한 것이다. 이 같은 전세가 소멸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정부와 여당이 주택담보대출 규제, 보유세(재산·종합부동산세) 강화에 이어 지난달 31일 이른바 ‘임대차 3법’ 중 계약갱신청구권(2+2년)과 전·월세상한제(5%)를 전격 시행하면서다.

두 달 새 전셋값 1억9000만원 뛴 곳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후 유례없는 저금리와 정부의 다주택자 보유세 강화, 임대차 3법 등이 맞물려 전세의 소멸 시기가 앞당길 것이라는 전망이다. 보유세 마련을 위해 임대인이 전세를 ‘반전세(전세+월세)’로 돌리고 있는 추세인데, 계약갱신청구권과 전·월세상한제가 이 같은 흐름을 더 가속화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임대차 3법으로 전셋값이 급등하면 반전세가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장 전셋값이 급등세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지난달 27일 기준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전주보다 0.14% 올랐다. 지난주(0.12%)보다 상승폭이 커졌고, 주간 상승률로는 올해 1월 6일 이후 7개월여 만에 최대 상승폭이다.

국토교통부의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서울 강동구 고덕동 고덕래미안힐스테이트 84㎡(이하 전용면적)형은 지난달 21일 7억9000만원에 전세 계약이 이뤄졌다. 5월 16일 6억원에 거래된 것과 비교하면 두 달 사이 전셋값이 1억9000만원이 뛴 것이다. 서울 성동구 금호동 래미안하이리버 114㎡형도 지난달 14일 9억원에 전세 계약이 이뤄졌는데, 같은 주택형이 불과 보름 전인 지난달 3일 7억4000만원에 거래됐다. 그나마 전세 물건은 씨가 마르고 있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성산시영 아파트는 3710가구 대단지인 데도 전세 물건이 3개뿐이다. 경기도 하남시 미사강변도시 스타힐스 아파트(1389가구)도 전세 매물을 한 손에 꼽을 정도다. 한국개발연구원 출신의 윤희숙 미래통합당 의원은 지난달 30일 페이스북에 “전세가 저금리 시대를 맞아 천천히 축소되고 있었는데, 임대차 3법으로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추게 됐다”며 “전세제도를 갑자기 몰아내는 것”이라고 적었다. 한국은행도 지난달 26일 유경준 미래통합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서 “임대인의 월세 선호 현상 등으로 전세 공급은 감소하는 반면 전세 수요는 높은 수준을 지속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전세는 잘 갖춰진 전세자금대출 등으로 월세나 반전세보다 주거비 부담이 낮은 편이다. 이런 전세가 사라지면 임대인의 주거비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말로 전세가 사라질까. 전세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직후 저금리 시대가 열리고, 집값이 약세로 돌아서면서 월세가 급증하자 ‘전세 종말론’이 등장했다. 통계청의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2008년을 기점으로 서울의 주택 임대차계약 중 전세는 감소세로, 월세는 증가세로 돌아섰다. 2012년엔 월세 비중이 전세를 추월했고, 2016년엔 월세 비중이 전체 임대차계약의 60.5%나 됐다.

그렇게 서서히 사라질 것 같았던 전세는 그러나 2016년 이후 집값이 급등하면서 부활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세가 줄면서 전셋값이 급등하자 전셋값을 레버리지(지렛대) 삼아 집을 사는 사람이 늘어난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경계하는 이른바 ‘갭투자’가 성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갭투자 덕에 부활한 전세는 코로나19 사태로 유례가 없는 초(超)저금리 기조가 이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세 줄면서 가격 올라 갭투자 성행

지난 1월 서울 아파트 임대차계약 중 전세 비중은 71.59%였고 4월(68.56%)을 제외하고는 70%대를 유지하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올 상반기 전월세거래량은 전국 112만6261건(전세 66만9826건, 월세 45만6435건)이다.

임대차 3법과 정부의 부동산 규제 등으로 전세의 월세 전환엔 가속도가 붙겠지만, 전세제도의 특성상 완전히 소멸하진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더라도 집값이 상승세를 보인다면 다시 전세 물건이 늘어날 수 있다. 전세 감소로 전셋값이 상승하면 전셋값이 집값을 밀어 올리고, 이에 따라 집을 사려는 사람이 늘면 전세 물건이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전세 자체는 임차인에게 아주 유리한 제도여서 시장에 수요는 충분하다”며 “정부 규제로 갭투자가 쉽지 않지만, 어떤 이유로든 집값이 다시 상승세를 보인다면 전세는 다시 늘어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한 부동산 전문가도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갭투자자가 많았던 만큼, 당장 전세가 소멸하긴 쉽지 않다”며 “줄었다 늘었다를 반복하면서 주택시장에서 레버리지 역할을 계속 해 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금 2억, 대출 4억 '6억 전세'가 '2억 반월세'로 바뀌면 연 1000만원→1596만원

어떤 이유로든 전세가 월세로 바뀌면 임차인 입장에선 주거비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주식 등으로 목돈을 굴려 연 5% 이상의 수익을 낼 자신이 있다면 전세보단 월세를 사는 게 유리하겠지만, 보통의 가구는 그렇지 못하다. 매달 따박따박 월세를 지출해야 한다면 피부로 느끼는 주거비 부담은 확 커질 수밖에 없다. 가령 전셋값이 6억원인 아파트를 보증금 2억원인 월세(전월세전환율 4%)로 변경하면 매달 133만원가량을, 연간 1596만원을 주거비로 내야 한다. 하지만 현금 2억원에 나머지 4억원을 시중은행에서 대출(금리 2.5% 기준)받아 전세로 산다면 주거비는 매달 약 83만원, 연간 1000만원에 그친다. 전세가 월세에 비해 40% 정도 저렴한 셈이다.

현재 서울·수도권 임차인은 월급의 20%를 임대료로 지불하고 있다. 국토교통부가 지난해 6~12월 표본 6만 가구를 대상으로 ‘2019년도 주거실태조사’를 한 결과다. 서울·수도권 임차인의 ‘월 소득 대비 월 임대료 비중(RIR)’은 2019년 20%로 2018년(18.6%)보다 1.4%포인트 상승했다. 전셋값이 뛰면서 2014년(21.6%) 이후 가장 높은 수치고, 2016년(17.9%) 이후 4년째 상승이다. 전국 평균 RIR은 16.1%로 전년(15.5%)보다 0.6%포인트 높아졌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주거비가 저렴한 전세로 인해 세계 주요 도시와 비교하면 높은 편은 아니다.

미국 주택정보업체 렌트카페가 2017년 세계 주요 도시를 대상으로 실시한 RIR 비교 조사를 보면, 서울은 총 30개 도시 중 18위를 차지했다. 멕시코의 멕시코시티가 RIR 60%로 1위를 차지했고, 2위는 미국 뉴욕 맨해튼(59%)이었다. 이어 4위 미국 로스앤젤레스(47%), 5위 프랑스 파리(46%), 6위 싱가포르(44%) 순이었다. 이들 도시에 살려면 매달 소득의 40% 이상을 주거비로 지출해야 한다는 얘기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임대차 3법 등의 여파로 전세가 빠르게 월세로 전환하면 RIR도 상승할 수밖에 없다”며 “임차인이 피부로 느끼는 주거비 부담은 훨씬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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