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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당기는 막걸리 …19도, 11만원짜리까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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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7호 25면

캬~. 목 넘김에 따른 통증, 그리고 목젖을 간지럽히는 희열이 교차하면서 나오는 신음. 동시에 텁텁하되 시큼 달곰한 맛을 알아챈 뇌가 보내는 감탄사. 장수든, 산성이든, 송명섭이든 어느 막걸리를 마셔도 이 소리는 똑같다. 외국인들도 절로 내뱉는, 이 '캬~'는 만국 공용어쯤 된다. 막걸리병 들어 귀에 대보시라. 한뼘 남짓 키를 갖고도 심연에서 올라오는 듯한 미지의 소리를 낸다. 그러니까 막걸리는 귀로도 마신다.

올해는 장마가 길어지면서 막걸리를 많이 찾고 있다. 비오는 날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들과 막걸리 따르는 장면을 합성했다. [중앙포토]

올해는 장마가 길어지면서 막걸리를 많이 찾고 있다. 비오는 날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들과 막걸리 따르는 장면을 합성했다. [중앙포토]

천상병 시인이 1991년 서울 인사동 한 주점에서 막걸리를 들이키고 있다. 막걸리 한 사발로 끼니를 대신하고 했던 그에겐 밥이 따로 없었다. [중앙포토]

천상병 시인이 1991년 서울 인사동 한 주점에서 막걸리를 들이키고 있다. 막걸리 한 사발로 끼니를 대신하고 했던 그에겐 밥이 따로 없었다. [중앙포토]

“이제 막 걸러서 떠납니다.”

긴 장마 속 편의점 판매 24% 늘어 #밀주·밀가루·카바이드 흑역사도 #보통 알코올 도수 6도, 센 건 19도 #한 병 1만원 넘어도 2030에 인기 #수출 최대 걸림돌, 15일 유통기한

지난달 27일 충남 태안 소원면의 소원양조장. 이곳의 이상협(56) 대표는 ‘막 거른’ 막걸리 2000여 통(개당 1200㎖)을 냉장 탑차 3대에 실었다. 그는 1940년부터 계속된 가업을 3대째 잇고 있다. 소원양조장은 태안군 유일의 양조장이다. 이 대표는 “8개 읍면에 양조장이 하나씩 있었는데, 1990년대부터 서서히 경영난을 버티지 못하고 7곳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큰마음 먹고 2011년에 최신식 설비를 구축했고 그게 막걸리 붐과 맞아 떨어졌다”며 “젊은 층을 겨냥한 프리미엄·칵테일 막걸리가 인기지만 그래도 우리 같은 ‘기본 막걸리’가 단단히 자리 잡아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짧은 시간에 막걸리의 흥망성쇠·환골탈태를 말해준 것이다.

지난달 27일 충남 태안의 소원양조장에서 이상협 대표가 막걸리 발효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이 대표는 1940년부터 계속된 가업을 3대째 잇고 있다. 그는 2011년 최신식 제조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환기가 잘 되도록 높은 양조장을 지었다. 맨 아래 작은 사진은 70여 년간 양조장 역할을 한 한옥. 김홍준 기자

지난달 27일 충남 태안의 소원양조장에서 이상협 대표가 막걸리 발효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이 대표는 1940년부터 계속된 가업을 3대째 잇고 있다. 그는 2011년 최신식 제조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환기가 잘 되도록 높은 양조장을 지었다. 맨 아래 작은 사진은 70여 년간 양조장 역할을 한 한옥. 김홍준 기자

# 흥망성쇠

지난달 29일 서울 시청 근처의 한 음식점 사장은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은 확실히 막걸리를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이날은 서울에만 50㎜의 비가 내렸다. 실제 빅데이터 분석 플랫폼인 썸트렌드가 지난달 발표한 ‘비 오는 날 연관 음식’은 막걸리가 1위다. 2년간 1위로 군림하던 커피를 제쳤다.

기상청은 올해 장마가 중부지방의 경우 8월 둘째 주까지 이어진다고 했다. 40일이 넘는다. 평년 장마 기간은 32일이다. 비도 많이 왔다. 전국 월 평균 강수량은 6월 184.6㎜, 7월(28일 기준) 325.8㎜. 작년 6월 141㎜, 7월 215.8㎜보다 확 늘었다.

막걸리 판매는 어땠을까. 편의점 이마트24에 따르면 최근 한 달(6월 24일~7월 23일)간 막걸리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7.4% 증가했다. 같은 기간 소주(4.0%)·맥주(3.6%)·와인(2.8%)을 앞지른다. CU에서도 막걸리 매출은 23.6% 늘었다.

장마 때는 햇볕을 덜 쬐게 되면서 행복감을 유도하는 호르몬인 세로토닌 분비가 줄어 일시적으로 우울증이 올 수 있다. 이때 당분과 탄수화물·알코올이 당기게 된다. 막걸리는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

마침 음식점에 막걸리가 배달됐다. 50대인 손님 A씨는 "막 거른 막걸리가 제맛"이라고 말했다. 반면 친구인 B씨는 "며칠 지나야 감칠맛이 돈다"며 맞받아쳤다. 이상협 대표는 "막걸리는 출하 2~3일 정도 지나야 최고의 맛을 내는데, 그 기간 미세하게 발효가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충남 태안의 소원양조장에서 지난달 27일 막걸리가 익어가고 있다. 막걸리는 같은 양조주인 와인·맥주와 달리 당화와 알코올 발효가 동시에 일어나는 병행복합발효 과정을 거친다. 김홍준 기자

충남 태안의 소원양조장에서 지난달 27일 막걸리가 익어가고 있다. 막걸리는 같은 양조주인 와인·맥주와 달리 당화와 알코올 발효가 동시에 일어나는 병행복합발효 과정을 거친다. 김홍준 기자

막걸리는 쪄놓은 쌀 또는 밀의 당화와 알코올 발효가 동시에 이뤄지는 ‘병행복합발효’ 방식을 거쳐 만들어진다. 같은 양조주인 맥주는 당화와 알코올 발효가 따로따로(단행복합발효)다. 와인은 아예 효모가 직접 과실을 발효시켜 제조 방법이 다르다. 때문에 일각에서 ‘라이스 와인’이라고 부르는 건 틀리다고 반박한다.

막걸리의 어원은 두 가지로 갈린다. 박정배 맛 칼럼니스트는 “『청구영언(靑丘永言·1728년)』에 '달괸 술 막걸러'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를 ‘마구 거른 술’이란 뜻의 막걸리 초기 어형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강지은 국립농업과학원 연구사는 “막걸리는 ‘이제 막(금방)’ 걸러진 술이란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막걸리는 시대 상황에 따라 부침이 심했다. 일제 강점기에 가양주(家釀酒·집에서 빚는 술)를 금했다. 『막걸리를 탐하다』를 쓴 이종호 작가는 “가양주 600여 종 중 몇 개만 남고 맥이 뚝 끊겼다”고 했다. 그래도 막걸리를 만들었다. 밀주였다. 1995년에야 집에서도 막걸리를 만들 수 있게 됐다.

한국전쟁 이후 먹을 게 부족했다. 박정희 정부는 쌀을 밥 지어 먹는 데 쓰자며 1963년에 밀가루로만 막걸리를 만들게 했다. 조선 시대에도 흉작이 들면 금주령이 떨어진 사례가 있었다. 1977년에야 쌀 막걸리가 돌아왔다. 카바이드 파동으로 막걸리 이미지는 ‘마시고 나면 골 때리는 술’로 추락하기도 했다.

탁주 얼마나 만들었나.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탁주 얼마나 만들었나.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냉장 유통 기술이 발전하면서 2000년에 지역 판매 제한이 풀렸다. 하지만 막걸리는 소주와 맥주에 밀리며 1980년대 초까지 70% 달했던 주류시장 점유율을 회복하지 못했다.

2000년대 후반 반전이 일어났다. 일본에서 막걸리(마코리·マッコリ)가 건강에 좋다며 많이 찾았다. 국내에 막걸리 광풍이 불었다. ‘욘사마 막걸리’가 나왔다. 막걸리 CF가 방송을 탔다. 뮤직비디오(윤종신의 ‘막걸리나’)도 나왔다. 2008년 막걸리 내수는 13만㎘ 선이었지만 2011년 41만㎘로 급증했다. 하지만 이후 막걸리 열기가 식으며 계속 30만㎘ 초반을 유지하고 있다. 수출도 줄었다. 2008년 막걸리 수출액은 약 400만 달러. 2011년에는 5280만 달러를 찍었다. 최근 4년간은 1200만 달러 수준이다.

# 환골탈태

막걸리는 보통 알코올 도수 6도다. 끓여서 알코올을 날려 1도까지 낮출 수 있다. 모주(母酒)가 그렇다. 1도는 주류로 인정받는 도수의 하한선이다. 이상협 대표는 “적정 과정을 거쳐 거른 막걸리는 16도, 17도까지 나오는데, 그 이상은 균(효모)이 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알려진 '가장 센' 막걸리는 ‘이상헌 탁주’로, 19도에 이른다.

값도 천차만별이다. 1000원대부터 11만 원(해창 롤스로이스)대까지 있다. 백화미인·봇뜰·삼양춘·이상헌 등 5000원~3만원 대도 포진해 있다.

전통주 전문 소개 플랫폼 ‘대동여주도’는 전통주 전문점 40여 곳의 판매 순위를 취합했다. 2019년 한해 가장 많이 팔린 막걸리는 지평 막걸리였다. 해창 막걸리, 느린마을 막걸리, 송명섭 막걸리, 복순도가 손막걸리(왼쪽부터)가 뒤를 이었다. [중앙포토]

전통주 전문 소개 플랫폼 ‘대동여주도’는 전통주 전문점 40여 곳의 판매 순위를 취합했다. 2019년 한해 가장 많이 팔린 막걸리는 지평 막걸리였다. 해창 막걸리, 느린마을 막걸리, 송명섭 막걸리, 복순도가 손막걸리(왼쪽부터)가 뒤를 이었다. [중앙포토]

전통주점 백곰은 지난해 주점 내 판매량 1위가 이화백주라고 밝혔다. 복순도가가 2위, 해창막걸리가 3위에 올랐다. 이런 막걸리를 소비하는 계층은 주로 2030. 이들을 중심으로 프리미엄 막걸리 시장이 커지고 있다. 일산의 한 주점에서 만난 30대 여성은 "막걸리를 만취할 정도로 마실 것도 아닌데, 비싸지만 나만의 맛을 찾아 와인처럼 딱 한 잔 마시는 게 좋다"고 말했다.

류인수 한국술산업연구소 소장은 "전반적인 탁주·약주 시장은 부진해도 프리미엄 시장은 성장하고 있다"고 했다. 남도희 한국막걸리협회 사무국장은 “탁주 면허를 가진 양조장 800여 곳에서 만드는 막걸리의 종류는 1500개에 이른다”며 “탁주 면허는 증가 추세에 있는데, 프리미엄 막걸리를 만드는 소규모 업체들이 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7년 이후 막걸리 출고량은 줄었지만, 출고액은 증가한 점을 들며 프리미엄 막걸리 시장의 활성화 증거라고 덧붙였다.

기존 녹색병 대신 재활용하기 쉬운 투명 병으로 교체한 서울 장수 막걸리. 2020년 대한민국 주류 대상을 받은 국순당 1000억 유산균 막걸리. 2019년 백곰 주점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이화백주. 알코올 도수 19도로 가장 센 이상헌 탁주(왼쪽부터). [중앙포토]

기존 녹색병 대신 재활용하기 쉬운 투명 병으로 교체한 서울 장수 막걸리. 2020년 대한민국 주류 대상을 받은 국순당 1000억 유산균 막걸리. 2019년 백곰 주점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이화백주. 알코올 도수 19도로 가장 센 이상헌 탁주(왼쪽부터). [중앙포토]

유난히 긴 장마 속 막걸리를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 하지만 우보라 다사랑중앙병원 원장은 "알코올 문제로 이어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사진 북카라반]

유난히 긴 장마 속 막걸리를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 하지만 우보라 다사랑중앙병원 원장은 "알코올 문제로 이어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사진 북카라반]

그래도 대중주로 부르는 1000원대 제품이 막걸리 시장의 바닥을 탄탄히 다지고 있다. 서울 장수막걸리와 국순당은 기존의 녹색병 대신 재활용이 쉬운 투명 병으로 전면 교체했다. 지평막걸리는 도수를 6도에서 5도로 낮춘 뒤 2030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부활하는 ‘국민주’ 막걸리는 여러 약점도 있다. 길어 봤자 15일에 달하는 유통기한은 수출의 최대 걸림돌이다. 세계무대에서 통할 마땅한 이름도 없다. 때문에 ‘코리안 사케’로 불리기도 한다. 남 사무국장은 “막걸리 세계화를 위한 연구개발이 더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감미료인 아스파탐과 일본 누룩인 입국 사용도 문제삼기도 한다. 남 사무국장은 "막걸리 전통 지키기와 과학화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라고 밝혔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비 오면 생각나는 막걸리+파전…대체 왜

“비 올 때 막걸리와 파전의 궁합은 국룰.”

지난달 29일 서울의 한 주점에서 만난 20대 손님들의 표현이다. ‘국룰’은 국민 룰, 즉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규칙을 뜻하는 신조어다. 비 오는 날 막걸리에 파전. 왜 그럴까.

비가 오면 일조량이 줄어 일시적으로 우울해진다. 이영란 한림대 성심병원 영양사는 "파전 밀가루에 들어 있는 단백질의 주성분인 아미노산과 비타민B는 몸속 탄수화물 대사를 높여 일시적인 우울증 해소에 도움 준다"고 했다.

막걸리 한 잔과 전 한 장은 절묘한 궁합이다. [중앙포토]

막걸리 한 잔과 전 한 장은 절묘한 궁합이다. [중앙포토]

남도희 한국막걸리협회 사무국장은 "막걸리의 누룩은 곡물 속의 전분을 쪼개주면서 당으로 바꿔주는데, 이런 과정이 우리 몸의 소화"라고 말했다. 전분 비율이 높은 파전의 소화에 막걸리 속의 누룩이 최고의 궁합이라는 것이다.

파전이 기름 위에서 익는 소리가 빗소리와 음파가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비가 오면 연상 작용으로 전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어릴 적 비 온 날 해준 부침개에 대한 추억의 소환이 작용하기도 한다. 이 몇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비+막걸리+파전'의 궁합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술에는 장사가 없다. 우보라 다사랑중앙병원 원장은 "비 내리는 분위기에 취해 가볍게 시작한 장마철 음주가 습관이 되면 알코올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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